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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록의 대부' 기타리스트 신중현

살아있는 기타의 신 ‘신중현’
오는 9일 ‘펜더 기타’ 연주 선보여

 

글|민경태기자 mkt@kgnews.co.kr

세 계에선 6번째로,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펜더기타를 헌정 받아 화제가 됐던 세계가 인정한 록의 대부, 살아있는 기타의 신, 신중현이 그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세 아들과 함께 오는 9일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검단홀)에서 공연한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 현란한 무대와 선정적인 퍼포먼스로 포장된 콘서트가 아닌 진정한 음악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전율하게 될 ‘펜더 기타’의 환상적인 연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신중현은 1938년 1월4일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났다.

이발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만주 신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해방이 되자 귀국열차를 탔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 정착했던 그의 가족들은 다시 충북 진천으로 피난을 갔다. 동네 밖 움막에서 살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해 사이를 두고 연이어 세상을 떴다. 이어 여동생도 영양실조로 죽고말았다.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 하나 남은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 때부터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해야했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고된 노동으로 모은 돈으로 기타를 사고 외국책들을 파는 서점에서 산 교본을 보며 독학으로 기타주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또 남대문시장에서 산 미군 통신용 무전기로 AFKN 방송을 통해 미국 음악을 들으며 ‘선진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음악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당시 아무 악기나 갖고 싶어 했어요. 그러던 중 운 좋게 모은 용돈이 유용하게 쓰인 거죠. 제가 중학교 2학년때입니다. 기타를 사고 외국 책들을 파는 서점에서 산 교본을 보며 독학으로 기타 주법을 익히기 시작 했어요. 처음 바이올린을 구입해 연습하다가 잘 되지 않아 기타로 바꾼 것이 오늘날의 기타 프레이어가 된 것이죠.”

이렇듯 그가 미제 어쿠스틱 전기 기타를 처음 갖게 된 것은 동양중학 2학년 때다. 야간부인 서라벌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도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중노동이 이어졌고 수업이 끝난 밤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다시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쉬는 시간과 식사시간에는 끊임없이 기타에 매달렸다.

그 시절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더라도 기타의 명인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1959년 고교 2학년 때 자퇴를 하고 공장도 그만두었다. 그가 종로 뒷골목의 기타학원을 순회하며 자신의 기타연주를 선보이자 뛰어난 기타리스트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한 음악학원에 특채됐다.

나아가 키가 작은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무대에 서는 시간을 빼놓고는 연습실로 지정된 원효로의 ‘화양 엔터테인 에이전시’의 악기 창고에서 기타에 빠져들었다.

“1960년 용산역 부근 미정보부 소속 ‘시빌리언 클럽’에서 첫 번째 기타 독주무대가 열리던 날이었어요. 두려움과 흥분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연주를 끝마치고 고개를 숙인 채 정신이 들 때까지 있었죠. 옆에 있던 선배님이 저에게 앞을 보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앞을 바라보니 클럽에 있던 미군 전부가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를 보내고 있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네요.”

이후 그는 월남행을 포기하고 신중현 사단이라는 스타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후 장미화, 박인수, 이정화, 김추자, 펄 씨스터즈, 임성훈, 장현, 바니걸스, 김정미 등의 가수를 수퍼스타로 만들며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린다. 이들의 앨범에는 가수 이름 옆에 꼭 신중현 작곡, 편곡집 이란 말이 붙어 있었다.

1973년 어느날 그는 청와대로부터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음악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정중히 거절한 신중현은 이후로 온갖 정치적 탄압과 검열로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다.

1978년 공연 활동이 해금되었고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모든 활동 금지 조치가 풀렸다.

재기의 활화산 같은 기쁨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고 이러한 기운은 1980년 9인조 록밴드 ‘뮤직 파워’로 탄생됐다. 이들이 연주하고 노래했던 ‘아름다운 강산’은 박정희 찬가를 거부하고 국민을 위한 노래로 만들었던 그의 의지를 발현한 곡으로 순식간에 전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내’라는 곡으로 우리의 정서와 서양 음악의 화합을 시도하고 ‘그동안’, ‘미소’ 등이 수록된 솔로 음반을 내고 90년대에도 ‘무위자연’과 ‘김삿갓’ 등의 앨범을 발표하는 등 음악적인 실험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는 이번 하남문화예술회관에서 세 아들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음악인으로 살아가는게 쉽지만은 않아요. 하지만 세 아들 모두가 음악을 한다는 것에 찬성했어요. 오히려 음악을 하게끔 그 분위기를 조성하며 돕는 편이였죠. 세 아들 모두가 인생을 가치 있게 보내길 원했지요. 음악인생은 험한 면도 있지만 그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공연은 대중을 만나는 기쁨이지만 무대에 오를 때 항상 두려움이 앞서지요. 그 이유는 저는 자주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이 아닌 단지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인인데, 트로트, 가요를 부르는 가수를 원하는 관객들에게 잘 맞지 않기 때문이죠. 음악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쇼를 위한 무대이고 또 하나는 음악성을 추구하는 깊은 음악이 있죠. 저의 음악은 겉으로 보는 음악이아니라 마음속으로 느끼는 음악이지요. 그렇게 이해주시면 더 이상 바람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세계적인 기타 회사인 펜더(Fender)가 2009년 12월 자사의 명품 브랜드 기타를 헌정 받은 소감을 말했다.

“이 기타는 제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진 세계에서 제일 좋은 하나밖에 없는 기타입니다. 물론 펜더기타를 헌정 받은 세계 뮤지션들 중 6번째지만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이죠. 헌정 기타는 하나 같이 그때마다 수공으로 상대가 원하는 대로 제작되기 때문에 저에게는 하늘에서 내린 기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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