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정현종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굴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든지 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정현종 시집 <한 꽃송이/문학과 지성, 1992>
사람으로 붐비는 앎이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거나 뭐든지 하여간에 그 모든 붐비는 앎은 끝내는 슬픔이니 우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청승맞게 울지도 말란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시인은 장난처럼 툭툭 내뱉고는 앎으로 붐비는 슬픔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렇다고 받아들이라거나 맞서라거나 하지 않는다. 낄낄거리거나 깔깔거릴 일도 없단다. 어차피 그 붐비는 슬픔 속에 삶의 모든 비밀이 가득하다는 듯이, 나도 붐비는 슬픔 속으로 슬쩍 끼어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