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다 어제보다 흐린 오늘 꽃이 떠나고 있다 네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나 여기 레테의 강 건너 네 곁으로 왔단다 함께 있는 때만이라도 즐겁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에요 너는 말하는데 꽃나무는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겠지 상처 다스리는 법이 페이지마다 씌어 있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들어가 비밀스레 나의 모더니즘을 읽는다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 선다 벼랑 끝에 바람이 분다 생은 스러지기 전에 크게 한 번 빛나는 법 꽃잎 떠난 자리에 황토 비 내리겠지 너 떠난 자리에 칠흑이 서겠지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2010
마지막 깊은 들숨처럼 솟아올랐다가 흩어지는 벚꽃, 호곡소리도 없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며 누가 또 한 생을 버리는가 보다. 늘 한쪽이 늦거나 이르거나 어느 한순간만이라도 사랑이 완벽한 적 있었나! 하릴 없이 방으로 들어와 가능한 한 난해한 책을 읽겠지. 곧 비 내리겠다. 황토 빛 물결 굽이치겠다. 철철 흐르겠다. 그 자리 캄캄해지겠다. /최기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