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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 산책]산문시(散文詩) 1

산문시(散文詩)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쎌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출처-신동엽 시집 신동엽 시전집-2013년 창비



 

 

 

우리가 꿈꾸던 세계는 언제나 한발 늦게 온다. 흐릿한 도시를 건너가는 빗줄기. 아직 더러운 얼굴을 씻지 못했는데 검은 비가 내린다. 우리에게도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거리낌 없이 나오는 “석양 대통령”이 있다면 ,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가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에 꽂혀 있다면,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가 서울역에 줄지어 기차표를 예매하는 그런 풍경이 있다면, “야만에 가담하지 않”고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에 훤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이 진흙탕 속을 견디며 뒹굴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희망을 품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하늘을 가리는 손가락들 사이로 삐져나온 빛들에 눈이 찔린다. 진정 우리의 미래는 이대로 과거로 흘러갈 것인가?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부끄럽지 않은 “석양대통령”을 우리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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