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구나 /송재학
외할머니는 밥공기에서 반쯤 밥을 자꾸 들어낸다 외숙모는 더
큰 그릇에 밥을 담아 외할머니가 밥을 들어내도 일정량이 되도록
조절해왔다 아무도 없을 땐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신다
같이 식사할 때만 자꾸
밥을 비워낸다 반 공기의 밥도
억지로 먹는다고 중얼거리신다
2
아흔 살 외할머니의 외출 가방은 아직도 악어, 악피(鰐皮)가 유
행하던 시절의 유산이지만, 인조 가죽이 분명하다고 내 삐띡한 의
혹은 웃고 있다 그렇더라도 악어과 악어목의 악어 가방은 지금
눈꺼풀 닫고 수면 높이에서 응시중이다
육식성 악어도 가끔 지퍼 열고
허기를 채운다 무얼 삼키는지
궁금하지만 명절이면 악어새 닮은 꾸개꾸개 천 원짜리 지폐가
내 아이들 손에 슬며시 날아와 앉는
날도 있으니 그게 죽은 악어
껍질이 아니라 영혼만 슬그머니
꽁무니 뺀 늙은 악어가 쥐 죽은 듯 가방 흉내를 내는 것이다
3
외할머니는 묘법연화경을
태워버렸다 아무리 경을 읽어도
당신은 아직 이승이라고 쫑긋하셨다
파킨슨병으로 하루에도 몇 번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맑은 마음으로 읽어가던
묘법연화경, 과두
문자처럼 비뚤비뚤한
자필 한글본 불경이었다
출처-송재학 시집 내간체內簡體를 얻다-2011년 문학동네
아흔 살 외할머니는 식사 때마다 “밥공기에서 밥을 자꾸만 들어”내신다. 그러다가 “아무도 없을 땐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신”다. 자신의 생을 자식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들어내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생을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번민한다. 아직 살아 있어서 미안하구나, 라는 말을 삼키며…. 이런 외할머니에게는 악어 가방이 있다. 그러나 그 외출 가방은 “죽은 악어 껍질이 아니라 영혼만 슬그머니 꽁무니 뺀 늙은 악어”이다. 악어는 가끔 지퍼를 열고 허기를 채운다. 또 명절날이면 아이들에게 악어새 닮은 “천 원짜리 지폐”를 주기도 한다. “눈꺼풀 닫고 수면 높이에서 응시”중인 악어는 가방 흉내를 내며 구석에서 외할머니의 오래된 생을 증명하고 있다. /이설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