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팽이처럼
/김광규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 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생략)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을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출처 - 김광규 시집 『좀팽이처럼』- 1988년 문학과지성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공감이 가는 시다. 왜 돈을 많이 빌리는 사람이 몇 푼일지언정 제 돈을 찾아가는 사람보다도 더 당당한가. 은행에서 큰돈을 빌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땅 위에서 바둥거리며 푼돈을 벌고 그것조차 아껴가며 사는 이 시대의 “좀팽이들”이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자본의 욕망이 마그마처럼 펄펄 끓는 대한민국의 심장부에서./박설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