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낙서
/김재혁
결혼이란 어여쁜 인형을 받고서
그것을 망가뜨려 가는 과정이라며,
어제 봄비가 와
한잔하자고 해서
비에게 한잔 사 줬다.
비에게 결혼 얘기는 안 했다.
비는 팔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입 없는 나무처럼……
-김재혁 시집, 『딴 생각』, 민음사
시적 화자는 결혼으로 인한 어떤 불화를 겪은 후 조용히 봄비를 바라보고 있다. 결혼은 선택이다.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 자신을 괴롭힐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 결혼뿐이랴.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삶의 위험한 파편들.
여기서 비의 말은 화자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힘들 때는 술 한 잔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뎌보라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무게는 무겁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비를 바라보는 일, 조용히 낙서를 하듯 견디는 것, 마치 나무가 비의 수다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처럼.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