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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 속에 불태운 예술혼 절절한 외로움 고스란히…

과천 추사박물관을 가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을 보낸 ‘과지초당’
그 옆에 자리한 큰 규모의 추사박물관

2층 입구 들어서면 추사 반신상의 미소 눈길
어릴 때 쓴 편지·시 통해 천재적 기질 짐작
암행어사 시절 결과보고서 등 귀중한 자료 多
제주 유배시절 그린 ‘세한도’ 쓸쓸함 물씬

 

1층에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자료 등 전시
청나라 학자들과 벗에게 보낸 편지 통해
뜨거운 학구열과 발자취 더듬어 볼 수 있어

日 후지츠카 가문 기증실 지하 1층에 마련
오래전 사라진 추사고택 사진 등 감상
외부접근 차단된 지하 2층 수장고에는
추사 친필 간찰 26점·기증품 고이 보관중


추사 예술 혼 담은 박물관 건립

과지초당 전경. 추사는 유배 후 이 곳에서 말년 4년을 보내며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지난 2005년 12월 60대 중반의 남자와 소수의 일행이 인천공항에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의 방일 목적은 외면적으론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추사와 청대 문화를 연구해온

후지츠카 아키나오(93) 옹을 이듬해 열리는 추사서거 150주년 학술대회에 초청하는 것이지만

그가 소장한 추사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픈 간절한 심정도 있었다.

인솔자는 당시 과천문화원 최종수 원장으로 추사연구회 회장이란 직책도 갖고 있어

추사에 관한 연구와 각종 행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물을 한보따리 챙겨갔다.

추사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요청에 그는 “한 점도 없다”고 시치미를 뗐으나 같이 간 일행이

추사 간찰을 본 사실을 귀띔 받은 최 원장은 기증의사를 타진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밤새 최 원장이 가져온 자료를 검토하고 감복한 아키나오는 이튿날 재회에서 “기증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듬해 비행기와 선박을 통해 추사 친필 간찰 26점과 청대 각종 서적 등 1만5천여 점이 한국 땅을 밟았다.

추사박물관 탄생의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07년 11월 주암동 184번지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 복원됐고 또 다시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그 옆에 추사박물관이 건립됐다.

지난 7, 8일 이틀간 취재차 오전 일찍 찾은 박물관은 매서운 추위 탓인지 고즈넉했다.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이 1824년 별서(別墅)로 지은 과지초당은 고증을 거쳐 팔작지붕에 방 5칸과 대청마루, 행랑채를 마련해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집 앞에 네모 형태의 연못을 조성했고 독우물도 만들었다.

지금도 차량교통이 많지 않은 이곳이 180여 년 전의 한적함과 고요함은 말할 것도 없어 번다한 정사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기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집채의 버팀목은 지은 지 8년 동안 비와 눈, 바람을 견디는 동안 본래 색깔이 바래져 오히려 고풍스런 멋을 지녔다.

집 앞엔 지난 해 11월 추사 동상이 세워져 과지초당의 무게를 한결 더했다.

높이 2.2m의 동상은 오른손에 접힌 부채를 들고 있고 왼손은 뒷짐을 진 채 꼿꼿한 자세로 옅은 미소를 띠어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영면하기까지 기거한 4년간 삶이 힘들거나 외롭지 않음을 시사했다.

그는 이곳에서 별세 3일 전에 쓴 봉은사 현판인 판전(板殿)과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과지초당 옆에 자리한 추사박물관은 전체부지 3천774㎡, 연면적 2천830㎡로 지하2층 지상 2층으로 구획돼 있다.

외관상으론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라는 느낌을 받지만 그 속을 들어다보면 추사의 삶과 예술 혼,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년의 외로움이 절절이 배여 있다.



세한도, 유배시절 외로움 느껴져

추사의 생애가 담긴 2층 입구에 들어서면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 반신상이 인자한 눈빛과 은은한 미소로 ‘어서 오시라’라며 반긴다.

김정희의 일대기와 가계도를 유리판에 새긴 패널을 유심히 살피다 몇 걸음 옮기면 8세 때 생부에게 올렸다는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 글씨는 당시 선비로부터 “어린 나이에 썩 잘 썼다”는 평을 받아 어릴 적부터 서예에 심취했음을 보여준다.

추사가 부친을 따라 머나먼 북경 사행(使行) 길에서 쓴 시 몇 구절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은 석령에 이르러 끝이나니 만리 벌판이 눈앞에 펼쳐지네./ 천지가 텅 빈 곳이리니 하늘과 땅이 여기에 다 모였네./(요동벌판)

그는 사행에 나서기 전 자하 신위에게 써준 송별시와 북경에서 중국학자인 옹방강과의 만남에서 나눈 필담서는 오랜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현대인에게 다가선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옆면엔 닳아 없어진 68자를 해독했다는 글귀를 새겨놓아 금석학의 대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릴라치면 김정희가 41세 때 암행어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내방객들에겐 생소하고 민정을 살피며 작성한 결과보고서는 국내 몇 안 남은 소중한 자료라는 허홍범 학예사의 설명에 그 가치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35세 되던 해 양자에게 써준 친필 학습서는 부정을 느끼게 했다.

발문까지 포함해 무려 14m에 달하는 그 유명한 세한도는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벽나무의 푸름을 안다’며 잊지 않고 찾아주는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동시 그 이면엔 제주 유배시절의 쓸쓸함이 절절이 배여 있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서한문 통해 본 학문적 깊이

1층은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란 타이틀을 달았지만 조선 북학파들과 청대 학자들의 학문도 엿볼 수 있는 장이다.

추사가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인 해외묵연(海外墨緣), 추사의 후손이 일제당시 5권으로 엮은 완당선생 전집, 김정희 별세 후 10년 후 편지를 모아 수록한 완당척독(阮堂尺牘)은 아키나오가 기증한 귀중한 자료다.

조선 비석에 대한 논문을 기록한 해동비고(海東碑攷)는 그의 금석학에 대한 깊이를 가늠하는 소중한 자료이고 젊은 시절 선(禪) 논쟁을 벌이며 친교를 쌓아온 백파 선사의 비문은 지금 선운사에 남아있어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다.

권돈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마천십연독진천호(磨穿十硯禿盡千毫)는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로 학구열을 불태운 열정에 숙연해진다.

지하 1층 후지츠카 기증실은 2대에 걸친 기증정신을 가슴에 담아두고 감상할 일이다.

이곳에도 추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아 오래전 사라진 추사고택과 편지를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그 옆에 자리한 체험실은 어린이들을 겨냥해 탁본으로 만든 세한도 등을 가져갈 수 있다.

외부의 접근이 차단된 지하 2층 수장고는 추사 26점의 간찰과 전시하지 못한 아키나오 기증품이 2중으로 된 벽속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260여㎡의 보관실은 사방이 오동나무로 둘러싸 향긋한 냄새가 풍겼고 실내온도와 습도까지 조절해 만년 보관해도 변질이 없을 정도로 철저했다.

박물관을 나서는 순간 조선시대 대석학자였던 김정희를 고난과 시련에 빠지게 했던 당쟁이 역설적이게도 학문을 한층 정진시킨 밑바탕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천=김진수 기자 k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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