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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오늘의 붕당정치

 

조선 인조 때 청의 침략을 당하고, 굴욕을 받는 것을 목격한 대신들은 북침을 계획하지만, 그만 이를 지휘하던 효종이 너무 일찍 서거함에 따라 북침은 실천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라의 미래와 전쟁을 계획했던 대신들은 효종 사후 왕의 어머니 대비(자의대비)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된다. 남인은 장자의 권위와 예에 따라 3년설을 주장하였고, 서인은 효종이 둘째이므로 일반 관습에 따라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이렇듯 서인과 일부 북인을 포함한 남인 간에 심한 정쟁으로 격화되었는데, 이것이 1차 예송논쟁으로 불리우는 기해예송이다. 정쟁의 다툼이 심해지자 현종은 논쟁을 금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서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서인이 득세를 하였고, 송시열은 그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이번에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또 다시 신하들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서인은 차자비였음을 감안하여 9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남인은 지난 논쟁 때 정한 대로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2차 예송논쟁으로 불리우는 갑인예송이다.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줬고 서인들이 대거 권력에서 물러나고 남인이 득세를 한다. 그러나 그해 현종이 숨을 거두고 어린 숙종이 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당쟁은 극에 달하게 된다.

숙종 재임 기간 동안 서인과 남인 간에 정권다툼이 이어졌고, 살육의 정쟁이 계속되면서 3번의 환국이 잇따랐다. 갑인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정치력과 군사력을 키워갔고, 이를 경계한 숙종은 서인들의 음모상소를 받아들여 남인들을 대거 처형하고 관직에서 쫓아내는 일이 벌어진다(경신환국). 윤휴를 비롯한 수많은 남인이 처형되면서 서인(이 당시는 서인 가운데에서 주로 노론)이 집권을 하고, 숙종은 서인 집안의 인현왕후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세자문제가 또 정쟁의 불씨를 제공하였다. 숙종은 남인계통의 장희빈에게서 아들이 생기자 이를 세자로 책정하고자 하는데, 서인이 이를 반대하자 서인들을 대거 처형하고 유배, 귀향을 보내게 된다(기사환국). 이로써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숙종은 다시금 인현왕후를 왕후로 받아들였고, 세력을 잃은 남인은 대거 몰락하였으며, 다시금 서인이 득세를 하였다(갑술환국). 상복을 얼마나 입는가를 놓고, 왕과 신하들이 수년간에 격론을 벌이는가 하면, 집권붕당과 비집권붕당 간에 음모와 모략이 이어졌고, 이 틈새에서 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 이어졌다.

조선 중기, 나라의 중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이러했다. 물론 이들 붕당정치 세력다툼의 이면에는 더 많은 대의명분과 정치적 이해관계, 정치이념 등이 녹아져 있다.

예송논쟁에서 차자로서 상대적으로 낮은 예우를 강조했던 서인의 입장에서는 성리학 원론적 입장과 귀족세력의 강화를 강조하였고, 비주류였던 남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여 집권세력을 견제하기를 희망하였을 것이다. 또 붕쟁다툼이 격화되어 있는 상태를 진화해야 했던 숙종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을 적절히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에 집권세력을 바꾸는 묘책을 써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과 권력을 둘러싼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의미에서 발전적이지 못했고, 정작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국가적 대의를 문제삼은 것도 아니었고, 깊은 이념적 성찰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할 시대가 아니었나 싶은 부분이다.

그런데 붕당정치의 유전자는 지금도 대물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현실에 비춰지는 정치의 모습이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우리 조선 중기의 역사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문제삼아서 서로 싸웠던 시기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여 상복기간을 합리적으로 조정, 합의하고, 그 대신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녕을 위하여 고민하고 정책을 개발한 시기였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부디 우리 후손들이 21세기의 붕당정치를 역사책에서 배우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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