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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예학의 대가, 김장생 선생의 돈암서원 4

 

코로나19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 세계인의 관심과 집중을 끌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이다. 특히 국가적인 위기와 혼란 속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절제된 행동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전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더불어 지구촌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고, 또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일까? 바로 ‘예(禮)’가 아닐까 싶다. 이 ‘예(禮)’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예학(禮學)’이다. 


논산의 돈암서원은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을 모신 곳이다. 사계 김장생 선생은 명종 3년(1548)부터 인조9년(1631)까지 83년의 생을 살았다. 12세의 나이에 송익필로부터 예학을 배우기 시작해 20세 무렵에는 이이의 제자가 되었다. 30대 이후에는 꾸준히 예학을 연구, 8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50여년간 이어졌다. 예학을 배우는 시기까지 더하면 거의 평생을 예학에 몸담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예학연구는 국가의례를 비롯해 양반의 생활예절,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의 연구 저술은 51권의 ‘사계전서’로 집약된다. 그 중에서 ‘문학관련 저술은 5권정도’ 밖에 안된다. 참으로 ‘예학의 대가’스럽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 사회의 혼란 시기를 살아내고 있던 김장생 선생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재정립하는 것은 ‘예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禮)’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예(禮)’를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개인의 수신을 강조하고, ‘예(禮)’에 걸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예학은 아들 김집과 우암 송시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영향력이 컸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급제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관직 생활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30세 때 창릉참봉을 시작으로 60세 무렵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큰아들 내외를 왜군에 잃기도 했다. 


그의 정치활동 중 눈에 띄는 부분은 33세(선조 14, 1581년) 때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를 다녀온 점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 김계휘는 종계변무 주청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종계변무라는 것은 중국의 법전인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잘못 기재되어 있어서, 이를 정정해줄 것을 중국에 요청한 사건을 말한다. ‘대명회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는 200여년의 시간이 흐른 선조 14년에서야 정정이 되었다. 이 일로 김장생은 돈녕부 참봉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중국을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잃고 만다.


김장생 선생은 인생을 통틀어서 노년기 활동이 가장 돋보이지 않을까 싶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서인들이 집권을 하면서 당시 75세였던 김장생 선생은 서인들의 영수로 받들어진다. 그리고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별세할 때까지 공조참의, 형조참판 등의 관직에 임명된다.  


사후에는 효종8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숙종의 명으로 문집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학자로서는 가장 명예로운 문묘에도 배향되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은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예(禮)’라고 생각했다. 당시 사회기강이 무너지고 각종 범죄가 늘어나면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내용이 바로 ‘예’이다. ‘예학’은 엄격한 질서와 정교한 형식을 중시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엄격한 질서와 디테일한 관리가 중요한 코로나19 상황에서 개인의 수신과 예(禮)에 걸 맞는 행동이 필요한 현 시대에 예학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김장생 선생이 살았던 사회와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사회기강은 무너져 내렸으며, 각종 범죄가 줄지 않는 상황이다. 이럴 때 빛을 발하는 것이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이다. 수 백년의 시간을 건넜지만 ‘예(禮)’라는 시스템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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