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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여우] 마로니에의 꿈

[안휘의 장편 연재소설] ① 극단 카프카

 

…“제 목숨만큼 좋아합니다. 연극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자 단장이 껄껄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툭 던지는 듯한 예의 투박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놈치고 오래 가는 놈 못 봤어!”…

 

오후 세 시 삼십 분. 윤희는 다시 ‘화가와 여간호사’ 공연장 안에 있었다. 새로 산 하늘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엄마에게서 배운 대로 색조가 보일락 말락 하도록 옅은 화장까지 하고 난 뒤였다. 두 번째 보는 연극인데도 감동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절반을 조금 넘게 채워진 객석의 반응도 뜨거웠다. 주연배우 이민지의 연기와 대사가 더 확실하게 귀에 와서 꽂혔다. 화가역을 맡은 남자배우의 연기도 능청스럽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능숙했다. 연극 종반부, 알몸을 보여주는 자극으로도 남자의 기억을 끝내 되살려내지 못한 여간호사 제니퍼가 화가 세잔에게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자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객석에서는 안타까운 한숨이 물결처럼 일었다.

 

“우린 오늘 처음 만난 거예요. 저 싫지 않으시죠? 기나긴 이별의 시간을 건너 당신을 다시 만난 일을 꼭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린 지금 처음 시작하는 거예요. 기억 저편으로 묻어버린 옛일들이야 대략 슬프고 아픈 빛깔이니 차라리 망각의 강물에 던져버린 게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

 

막이 내리고 커튼콜이 끝난 다음 출입구에서 만난 주연배우 이민지가 뜻밖으로 윤희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어제저녁 공연에도 오셨죠?”

“네. …그런데 어떻게?”

“눈빛이 기억났어요. 아가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아주 특별해요.”

“이민지 배우님 연기가 좋아서 또 보려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손을 잡으려고 이민지에게 달려드는 다른 관객 때문에 대화를 더 이어가진 못했다. 윤희는 그녀의 매력에 급속하게 빠져드는 자신이 이상했다. 영화를 좋아해서 많이 보았다. 그러나 연극 현장에는 영화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색다른 감동이 있다. 그것은 전율을 부르는 마력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도 윤희는 이런저런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마로니에 광장 벤치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학로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연신 까르르 웃거나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여자들도 구김살 없는 얼굴이었고,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도 하나같이 즐거운 눈빛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꿈만 같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도 그렇거니와, 어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아버지가 샘 다방 최 마담을 안방으로 끌어들인 일을 떠올리자 부르르 진저리가 났다.

 

박천수 사장네를 협박해 받아낸 아버지의 돈을 훔쳐 동천시를 떠난 일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윤희를 아껴주던 사람들, 특히 담임 장시욱 선생에게 작별인사도 못 하고 떠나온 일은 마음에 걸린다. 내가 사라진 걸 알고 걱정에 빠졌을 친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문득 영서와 명혜가 보고 싶다. 그 아이들은 또 얼마나 놀라고 있을까. 하지만 어쩌랴.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나는 낯선 도시 한복판에 서 있다. 넓디넓은 서울 바닥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혼자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외길이다.

 

윤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는 선택했다. 부딪치자. 앞길이 막혔을 때는 무작정 부딪쳐서 길을 내보는 것이 더 빠른 해결책일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은 바로 장시욱 선생이었다. 연극반원을 모집하고 연습을 막 시작할 무렵에 들려준 장 선생의 그 말을 처음에는 단지 용기를 가지라는 말 정도로만 들었었다. 하지만 작은 도시 동천시의 크지도 않은 고등학교에 교장선생과 학부모들의 반대를 끈질기게 녹여내는 모습을 본 다음, 비로소 윤희는 장 선생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장시욱 선생은 도전하는 삶을 실천으로 가르치는 교사였다. 아마도 연극 연습 도중이었을 것이다. 답이 안 보일 때일수록 문제의 본질로 돌아가라는 말도 해준 것 같다. 그래, 도전해보는 거다. 지나가던 청년 둘이서 윤희를 힐끔거리다가 멈춰 서서 쑥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윤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벤치에서 일어나 당당한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왔다.

 

“이민지 배우님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공연을 하루 남겨놓은 저녁 공연이었다. 세 번째 보는 공연인데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막이 내려진 뒤 윤희는 소극장 안에서 제일 늦게 일어나 천천히 출입구로 나왔다. 관객들이 출연진과 인사를 끝내고 다 빠져나갔을 무렵 복도에 서 있는 이민지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말을 걸었다. 이민지는 윤희를 알아보았다.

“오늘도 오셨네요. …제게 무슨 부탁이 있다고 하신 건가요?”

“네. 죄송하지만, 카프카 단장님 좀 뵙게 해주세요.”

그날은 커튼콜을 할 때 백발을 뒤로 묶은 그 건장한 털북숭이 단장은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하긴 공연마다 단장이 커튼콜 무대에 서는 건 아니라고 듣긴 했다.

 

“단장님은 왜?”

“제가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연극을 좀 배웠어요. 본격적으로 연극공부를 하고 싶어서 무작정 대학로로 왔거든요. 이민지 배우님의 연기가 너무 좋고 그래서 카프카 극단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윤희의 당돌한 말을 듣는 이민지의 표정에 당혹한 빛이 역력했다. 그녀는 말을 삼킨 채 새삼스럽게 윤희의 몸을 아래위로 톺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단장님께 여쭤볼게요.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그러고는 복도에서 무대 뒤쪽으로 나 있는 연기자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착하려고 애를 썼지만, 가슴이 자꾸만 떨렸다.

 

단장은 나오지 않았다. 하도 오래 나오지 않아서 만나주지 않으려는 모양이라고 체념하고 막 돌아서려는 찰나에 이민지가 털북숭이 단장의 손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녀는 윤희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개하듯 말했다.

“바로 이 아가씨예요.”

윤희는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윤희라고 합니다.”

단장은 성성한 긴 백발을 묶지 않고 뒤로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굵은 눈썹마저 하얘서 무슨 산신령 같은 느낌이 났다. 단장은 왕방울만 한 눈으로 윤희의 얼굴은 물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짯짯이 훑어보았다. 이민지가 약간 벙글거리는 표정에다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단장과 윤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연극 좋아해?”

한참 만에 나온 단장의 첫마디는 무뚝뚝하면서도 차가웠다. 윤희는 놓칠세라 얼른 대답했다.

“예. 좋아합니다.”

“얼마만큼 좋아하는데?”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단장이 만족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목숨만큼 좋아합니다. 연극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자 단장이 껄껄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툭 던지는 듯한 예의 투박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놈치고 오래 견디는 놈 못 봤어!”

그러고는 휭하니 거구를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 극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옆에 서 있던 이민지가 호호호 하고 웃었다. 이걸로 끝인가보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윤희의 팔짱을 끼었다.

 

“김윤희라고 했나? 우리 단원들 있는 곳으로 가자구.”

윤희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주춤거렸다. 그러자 이민지가 다시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륵 웃고는 말했다.

“저 양반은 그 누구도 칭찬하거나 합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 나가!’ 하기 전에는 그냥 따라다니면 돼.”

아하, 그렇구나. 하지만 윤희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극단 카프카에서의 모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 극단 말단 배우로서의 고달픈 생활로 윤희는 마음고생을 합니다. 전혀 새로운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 ‘[11] 마로니에의 꿈 -② 여배우 이민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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