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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2)

 

조선시대 평민이 양반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과거 급제뿐이었다. 서원이 등장하기 전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서울 중앙에 있었던 성균관과 지방에 있었던 향교였다. 당시 과거 급제를 위해 유생들이 주로 찾았던 교육기관은 향교였으며, 향교는 공자를 모시고 제향과 교육을 담당하던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당시 향교는 오직 과거급제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었고, 시대적으로 향교를 대신해 성리학 본연의 학문을 가르칠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주세붕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인재 양성 기관’으로서 서원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조선의 관리가 되어 백성과 임금을 위해 일해 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서원 유생 선발부터 서원에서 이루어지는 공부의 초점이 모두 조선의 관리가 되기 위한 내용에 맞춰져 있었다. 그리하여 백운동 서원은 실제로 ‘과학’ 명소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유생들의 공부 방법 중 하나인 ‘거접’이 대유행을 하고 있을 때, 퇴계 이황은 풍기군수로 부임해 왔다. 퇴계는 이 거접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유학에서 말하는 공부는 ‘도(道)’를 깨달아 실천하기 위한 ‘도학(道學)’ 탐구와 덕성 함양이었다. 퇴계 이황은 이러한 교육이 서원을 통해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백운동 서원을 공인화 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종은 1550년(명종5년)에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이 담긴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편액을 하사했다. 이로써 백운동 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타이틀과 ‘공식적인 국가 인증기관 및 재정적 지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었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한 것은 불과 1년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초로 사액서원을 만들고, 국가의 인증과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서원이 조선에서 독자적인 교육기관으로 정착할 수 있게 만든 공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초기의 소수서원은 결과적으로 과거시험을 위한 학문인 ‘과학(科學)’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퇴계 이황이 추구했던 ‘도학’을 탐구하는 교육기관으로 거듭난 것은 18세기 들어서이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 ‘백운동(白雲洞)’은 퇴계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서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소수서원의 위치는 소백산 정상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인 영귀봉을 주산으로 한다. 영귀봉은 신령스러운 모습을 한 거북이 형상이다. 또한 소백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줄기 ‘죽계(竹溪)’가 소수서원을 감싸며 흐르고, 순흥 읍내까지 흘러들어간다.

 

순흥은 과거 안향, 안축 등 순흥 안씨들로 인해 중흥을 이루기도 했고, 단종 복위운동으로 혁파된 아픔을 겪었지만 주세붕에 의해 ‘조선 서원의 첫 건립지’라는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주세붕은 서원 건립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인조11년(1633)에 소수서원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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