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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窓] 지금은 애도할 시간


회색 도시를 알록달록 수놓았던 단풍이 어느새 지고 있다. 나무는 이제 마지막 잎새마저 훌훌 떨군 채 앙상한 맨몸으로 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봄 ‘꽃놀이’와 달리 가을 ‘단풍놀이’는 잔인하게 느껴진다. ‘놀이’보다는 ‘애도’가 어울릴 것 같다.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다행히 당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스 글릭의 <애도>(류시화 옮김)라는 시다. 죽음이라는 현상 혹은 사건에 대해 이토록 정곡을 찌르는 시적 표현도 드물겠다. 살아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평가가 갈리더니만 죽으니까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의 죽음이 갑작스러울수록 평가는 더욱 후하고 슬픔은 더욱 큰 법이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실하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옷깃을 여미는 법이니까.

 

오죽하면 그리스도교에서 ‘원죄’라는 말을 고안했을 정도로 태생이 이기적인 인간은 타인을 절대로 곱게 봐주지 않는다. 자기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한편, 타인에 대해서는 더없이 야박하게 군다. 그런 인간이 타인을 좋게 말할 때는 오로지 그의 죽음 앞에서뿐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만 관대하다.

 

자기의 죽음일 때는 사정이 다르다. 관대하기는커녕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남의 죽음에 대해 진실로 ‘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는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조문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줄지어 나가”다가 오랜만에 만난 동료 혹은 친구와 “서로 포옹”한다. “길에 서서 잠시 얘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저녁 산들바람이/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삶이다! 너무 하찮아서 살아 있는 사람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삶, 오직 죽은 사람에게만 간절하게 포착되는 평범한 일상.

 

그래서 시인은 죽은 사람이 죽은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 격렬한 질투를 느낄” 테니 말이다. 자신이 더는 누릴 수 없는 삶에 대하여.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운 좋은 삶”을 누리며 사는지 아는 이가 드물다. 시인의 촌철살인이 빛나는 건 이 대목이다. <애도>라는 시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우리의 불감증이야말로 정작 ‘애도’의 대상이라고 꼬집는다.

 

겨울로 들어가기 전 나무는 온 힘을 다해 자기만의 색깔을 뽐낸다. 수치도 후회도 불평도 원망도 다 내려놓고서. 그 찬란한 기억이 있기에 겨울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11월의 한복판에서 나무가 사람에게 묻는다. 그대는 한 생을 살면서 자기만의 색깔로 뜨겁게 불타오른 적이 있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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