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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불교전래 기록들의 수수께끼

가야불교 이야기①

 

 

 

고구려도인에게 편지 보낸 동진의 승려

 

우리나라 각급 학교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소수림왕 2년〉조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부도(浮屠: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고구려의 토산물을 전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삼은 내용이다. 이때의 진(秦)은 시황제의 진나라가 아니라 서기 350년 저족(氐族)인 부홍(符洪)이 세운 나라인데, 보통 전진(前秦)이라고 부른다. 저족은 그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은데, 강족(羌族)과 같은 계통의 민족으로서 현재 티베트에 사는 장족(藏族)도 같다.

 

《한서》 〈지리지〉에 농서군(隴西郡)이 나오는데,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남부 일대다. 농서군은 산하에 11개현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저도(氐道)현이다. 이 저도현에 대한 주석에서 당나라의 학자 안사고(顏師古)는 “저(氐)는 이족(夷族)의 종족 이름이다. 저족이 사는 곳이어서 저도(氐道)라고 불렀다”라고 설명했다. 저족이 세운 전진은 350년 건국했다가 394년에 무너지지만 건국하지마자 급성장해 2년 후에는 황제를 자칭하면서 장안을 수도로 삼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370년에는 동방의 전연(前燕)과 서북방의 전량(前凉) 및 북방의 대국(代國)을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하북성과 요녕성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와 교통로가 열려 사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소수림왕 4년(374)에 승려 아도(阿道)가 오자 그 이듬해 봄 2월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주석하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주석하게 했다면서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작이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해동불법의 시작’이라는 말은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덧붙인 해석이다. 이 기록을 토대로 372년에 불교가 처음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수림왕이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면 진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를 보내자 곧바로 사신을 보내 사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양 고승전(梁高僧傳)》이라는 책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양고승전》은 그냥 《고승전》이라고도 불리는데 양나라 승려 혜교(慧皎)가 편찬한 불교서적으로 후한 영평(永平) 10년(67)부터 중국 남조(南朝) 양(梁) 천감(天監) 18년(519)까지 453년간의 승려에 관한 기록인데 모두 257명이 등장한다. 이 책의 의해(義解)에 밝은 14명의 승려 중에 동진의 승려 지순(支遁:314∼366)이 있는데, 그가 고려도인(高麗道人)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순은 하남성 개봉(開封) 출신으로 스물다섯 살에 출가해서 현재 소주(蘇州)시 서쪽 교외의 지형산(支硎山)과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신창(新昌)일대인 섬현(剡县)에서 주석했던 승려이다. 그래서 《양고승전》은 지순을 진나라 섬현의 옥주산(沃洲山)에서 주석했던 승려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지순은 전진의 승려 순도가 고구려에 도착하기 전인 366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전에 고려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고려도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진의 저명한 승려 지순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음은 분명하니 그가 불교에 대해서 몰랐을 가능성은 없다. 이는 순도가 오기 이전에 고구려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말해준다.

 

◇ 백제의 불교전래

 

백제의 불교전래 기사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는 백제 침류왕 1년(384) 9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晉)나라에서 오자 “침류왕이 영접하고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로써 공경했는데, (백제의) 불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고구려의 불교전래 기사와도 다르다. 고구려는 진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순도를 보냈으니 나라 사이 외교행위의 하나였다. 그러나 호승 마라난타는 사신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온 것이다. 호승은 중국인과 모습이 다른 인종을 뜻하는데 인도 출신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도 출신이 진나라를 거쳐 백제에 온 것이다. 진(晋)은 서진(西晉:266~316)과 동진(東晉:317~420)으로 나뉜다. 유비와 조조와 손권이 각축했던 위·촉·오(魏蜀吳) 삼국시대의 승자는 위나라 승상이었던 사마의(司馬懿) 집안에서 세운 진(晋)나라였다. 그래서 사마진(司馬晋)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진은 중원통일의 기세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북방 기마민족들에게 중원을 빼앗기고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 내려왔는데 이것이 동진이고 마라난타는 동진을 거쳐 온 것이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는 마라난타가 개인자격으로 왔는데 침류왕이 마치 오랜 지인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궁중으로 영접하고 예로 대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는 이듬해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고 말한다. 도첩(度牒)은 나라에서 발급하는 승려증명서이다. 9월에 백제에 온 마라난다는 불과 5개월 사이에 사찰을 세우고 승려를 교육시켜 국가로부터 도첩까지 받아냈다.

침류왕이 불교에 대해서 알지 못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인도 출신으로 동진에서 온 이국 승려가 침류왕을 만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침류왕이 불교를 전혀 알지 못했다면 마라난타를 만나자마자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다섯 달 후에 사찰을 세워 승려들에게 도첩을 준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침류왕과 백제인들이 불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때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양고승전》에 후한 명제 영평(永平) 10년(67)의 승려들에 관한 기록들이 있으니 1세기 때인 후한 명제(明帝:재위 27~75) 때는 이미 들어온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 고대왕조는 대부분 이동설에 의한 건국사화를 가지고 있다. 허왕후처럼 해양으로 이동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륙에서 이동한 건국사화가 많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고립되어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후대인의 무지에 의한 오만이다. 쇄국정책을 실시했던 조선인들이 고립되어 살았으면 고립되어 살았지 우리 고대 선조들은 대륙과 해양을 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로마에서 만든 유리용기인 로만 그라스는 경주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등 신라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었지만 최근에는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로마인들이 직접 로만 그라스를 가지고 신라와 가야까지 왔는지, 신라와 가야인들이 로마에 가서 로만 그라스를 가지고 왔는지,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이 가져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 고대 선조들의 교류범위가 광대했음을 말해주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불교는 중국에 전해진지 300여년 후에야 이땅에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불교전래 기록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이미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두 나라 왕실에서 이미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개연성도 크다. 따라서 소수림왕 2년(372)과 침류왕 1년(384)의 불교전래 기록은 두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시기가 아니라 왕실에서 불교를 공인한 시기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가야 불교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가야의 불교 전래시기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서로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왕후사의 창건과 폐지〉조에는 김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이 시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원가(元嘉) 29년(452)에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으로 인식한다. 이에 따르면 가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452년이 되는데, 이 또한 모순임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이 기록은 가야 왕실에서 수로왕과 허왕후가 혼인한 곳에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지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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