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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고성(孤聲)]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3·1절이 지나갔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2주년이라고 썼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2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국외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당시 국내 최대 종단인 천도교의 지도자들은 비밀리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마침 개신교에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불교계의 두 분의 스님이 합류하니 종교계가 앞장서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준비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 인쇄하다가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활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였다.

 

만세시위는 당일 오후 2시 경성 등 전국 6개 도시를 시작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당황한 일본은 민족대표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고 전국의 시위에는 강력한 무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밟으면 밟을수록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었다. 특히 경기도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수원 화성 지역은 장날마다 시위가 일어났으며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은 대표적인 피해사건이 되었다.

 

3월부터 3달 동안에만 시위에 나선 이가 210만 명에 이르고 체포·투옥된 수도 4만6948명, 부상자 5만명 이상이었으며 사망자도 7500명이 넘었다. 그런데 운동이란다. ‘쓰리포인트원스포츠’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단 말인가? 3·1운동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의 초안에도 분명 3·1혁명이었다. 그러나 국회로 넘어가 심의 중에 바꾸었는데 일설에는 대통령에 유력한 이승만의 온화한(?) 이미지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첨꾼들이 권했고 이승만이 동의함으로써 헌법전문에 운동으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이승만도 일제강점기 시절 내내 사용하던 3·1혁명을 버린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3.1운동이 아닌 3·1혁명, 3·1대혁명이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과 대한민국임시헌장(1944)에도 명백히 3·1혁명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지난 3·1혁명 100주년 당시 정명(正名)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명되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된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 혁명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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