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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창] 객관성의 신화와 폭력

 

학문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여기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일상생활에서도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우고 싸우면 양쪽 말을 다 들어 봐야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판에, 학문 세계는 오죽할까? 무릇 학문 연구란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지, 한쪽 입장만 대변하거나 연구자의 주관적 경험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게 불문율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과학의 보기를 들어보자. 19세기 유럽에서 인기를 끈 골상학의 경우다. 당시 유럽은 턱의 모양, 안면의 각도, 골격의 모양 등을 토대로 인종과 남녀를 구분하는 골상학이 유행했다. 이를테면 뇌의 무게를 비교해본 결과 여성의 뇌가 남성보다 가벼우므로, 여성은 지능이 낮으며, 그래서 대학교육을 받는 게 무리라는 식의 결론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아가 흑인의 뇌는 백인보다 가볍기에, 흑인이 백인의 지배를 받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도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과학연구라는 그럴듯한 외연을 입었지만, 속내는 사회통념을 재확인한 데 불과했다. 19세기에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백인 남성들은 남녀차별과 인종차별을 당연시한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과학의 이름으로’ 재가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골상학은 결국 얼마 못 가 사이비 과학으로 낙인찍혀 영원히 퇴출당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의 존 마크 램지어 교수가 쓴 논문이 말썽이다. “국제법경제학리뷰”라는 학술지에 제출한 “태평양전쟁에서의 성(性) 계약”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정의했다. 그 근거로 이른바 ‘계약서’를 들이밀며, 일본 측의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은 ‘순수한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그가 내세운 잣대가 바로 ‘학문의 객관성’이다. 국내외 역사학계와 시민단체의 규탄 성명이 이어지는데도 끝내 그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측의 변명 역시 똑같다.

 

객관성의 신화는 대중의 눈을 가린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법 전문가가 설마 허튼소리를 할까 싶다. 여기에 ‘하버드대’ 프리미엄까지 가세하면, 대중의 신뢰는 급물살을 타기 마련이다. 그가 찾아냈다는 문제의 ‘계약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뒷전으로 밀린다. 이 땅에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이른바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며 홍위병 노릇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학문 활동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문하는 사람의 삶의 자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램지어 교수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것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하지만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하버드에 입성해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중수장’을 받을 정도로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러니 객관성의 신화에 속지 말자. 오히려 객관을 가장한 폭력에 주목하자. 역사와 윤리가 만나는 건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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