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의 조건이 지금보다 더 나빴던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 깊은 지하 갱도에서 말 등에나 씌우는 마구(馬具)를 둘러메고 팔 다리로 기어서 탄차를 질질 끄는 그 지독한 노동에 시달렸던 노부인들이 아직도 몇 사람 살아 있다.”
조지 오웰이 1937년 출간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영국 북부 탄광지역 위건의 빈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사한 르포 문학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그녀들은 임신 중일 때도 이 일을 계속하곤 했다. 요즈음에도 만약 임신한 여성들이 탄차를 끌어야만 석탄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석탄 없이 지내기보다 차라리 임신부들이 탄차를 끌게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가 비교적 고상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목구멍에는 석탄 먼지가 가득하고 눈까지 시커멓게 된 채 강철같은 팔과 배의 근육으로 삽질을 해대면서 지하에서 악착스럽게 일하는 이 가련한 사람들 덕택이다.”
그러면 그 ‘가련한 사람들’은 왜 이리 일해야 하는가? 그 까매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 하랴. 조지 오웰은 수입이 끊기는 공포를 이렇게 단적으로 짚는다.
“가장 훌륭한 지성인도 실업에는 맞서지 못한다.”
- 계급투표와 20대 남녀의 내부 모순
2021년 4월의 서울, 부산 시장 보궐선거는 여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그런데 투표행태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강남 3구역과 20대 남성들의 압도적인 보수정당 투표다.
대한민국 최상류 계층의 집결지인 강남 3구는 예상대로 철저한 계급투표의 응집력을 보였고, 20대 남성들의 선택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계급과 일체화된 투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대 여성들은 이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진보적 투표를 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구성해나갈지에 직결된다. 당연히 기성세대의 일차적 책임이자 당사자 세대의 도전적 선택이 동시에 필요한 사안이라는 점 또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상상력의 위기, 권력의 위기(Crises of Imagination, Crises of Power)》를 쓴 캐나다 문화비평 교수인 맥스 해이븐(Max Haiven)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위기다”라고 정면으로 치고 나온다.
“우리는 가치가 약탈당하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다. 착취와 혐오, 편견과 분열 속에서 하루 하루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인간은 그 어디에서나 “대체가능한 일회용 노동상품”이 되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저임은 일상이고 직업 안정성은 무너진 지 오래이며 실업의 공포는 노동강도와 저임을 유지 시켜준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중요하지 않고, 노동시장에서 돈으로 계산되는 비정한 가격만 남는다.
- 착취당하는 청년세대
이 전쟁의 최전선에 집결당한 이들이 다름 아닌 “청년세대”들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들은 지금 총체적인 “프롤레타리아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불안정한 상태를 뜻하는 ‘프리케리어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가 합쳐진 “프리케리아트(precariat)”의 출현이 그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들 청년세대는 착취와 약탈의 가장 취약한 대상이 되고 있으며 자신의 노동가치가 끊임없이 저평가되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수탈당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그만큼의 여유를 누린다. 더군다나 생존을 다투는 적대적 경쟁에 몰린 상황에서 청년세대에게 공동체적 협력과 연대의 방식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들 “신자유주의 키즈(Neoliberal kids)”에 제공된 교육은 윤리적 사유와 선택, 그리고 역사의식을 고민하게 하지도 않았고 공적 자산의 혜택을 누리게 해주지도 못했다. 그런 과정에서 계급의식은 해체되고 세대협력을 가능하게 할 역사의식의 전승은 단절된 상태에서 금융자본이 신화로 제작한 계급상승의 욕망만 부추겨진 채 좁아터진 구석자리만 겨우 남겼다. 그러니 그 경쟁이 얼마나 격렬해질 것인가?
이런 조건에서 젠더 문제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이들 청년세대의 남과 여를 적대전선으로 맞서게 하는 일에 이용되기조차 한다. 오랜 투쟁의 결과물인 여성주의의 권리는 젊은 남성들에게 계급적 역차별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는 이들의 내부적 적대감을 포획하여 계급모순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공정”이라는 개념은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쪽으로 진전하지 못한 채 그나마 구석이라도 차지하는 “경쟁의 절차”만 논하는 걸로 제한되도록 하고 있다. 저항은 꿈도 못꾸게 하고 체제에 길들이는 방식이다.
- 답은 급진적 개혁, “커먼스의 탈환”을 위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공동전선과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급진적 프로젝트”만이 답이다. 토지와 주택에서 교육과 육아에 이르기까지 이들 청년세대가 공적 자산을 최대한 누리도록 해야 한다. 이들 세대는 바로 그 공적 자산의 확대를 의미하는 “커먼스(commons/공유지)의 탈환”을 위해 자신들의 공동의 적인 자본의 성채를 거세게 공략해야 한다. 정치경제적 공유지를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권리로 손에 넣어야 한다. 토지공유제부터 시작해보자.
“점령하자, 우리의 커먼스를!” 운동이 혁명적으로 펼쳐져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주도하는 청년세대답다. 자본의 성채에 편안하게 들어앉은 영주 또는 그들과 손을 잡고있는 보수정치세력은 이들에게 해결책이 결코 아니다.
이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우리는 극우세력에게서 정치적 메시아를 구하는 대중 파시즘의 확산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조지 오웰도 이미 예견한 바였다. 개혁은 보다 급진화되어야 한다. 집권세력과 진보정당의 계급전략 또한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혜택이 현실이 되는 순간 지지의 구도는 바뀐다.
“우리가 그런 정당을 가질 수 없다면, 파시즘이 대두될 것이다. 나치의 깡패 대신 교양있는 경찰, 나치당의 스와스티커 대신 사자와 일각수가 있는 비열한 영국식 파시즘 말이다.”
우리의 미래세대가 이들의 밥이 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