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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26 -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2)

백령도의 행정구역과 지명의 변천-1

 곡도, 오군포, 백령진, 장연군, 옹진군, 8·15 광복, 한국(6·25) 전쟁 등과 같은 지명이나 사건은 백령도 행정구역을 얘기하면서 언급되는 대표적 명칭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한 변천 과정을 거친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의 행정구역과 지명에 관한 얘기다.

 

행정구역은 행정기관의 권한이 미치는 일정한 구역을 말하는데, 그 변천과정은 백령도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실마리이자 스모킹 건(smoking gun)인 셈이다.

 

백령도에 처음 문이 열린 것은 기원전 1000년 경인 신석기 시대였다. 진촌리와 용기포 조개더미에서 인류의 생활 흔적(빗살무늬토기 및 뗀석기로 만든 농경 도구류)을 찾았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이 확인된 바 없으나 기원전 3~5세기 쯤으로 보이는 손잡이가 있는 흑도장경호(黑陶長頸壺)가 진촌리에서 찾아져 알려진 바 있어 신석기 시대부터 영속적으로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당시는 경계도 영역의 구분이 없었지만 눈여겨 볼 곳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진촌 일대다.

 

현재도 진촌을 ‘읍내’ 또는 ‘소재지’라 부르거나 진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외4리(북포리, 남포리, 연화리, 가을리)로 표현하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생활 터전이자 역사시대에 삶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서울의 명동처럼 …

 

▶ 체크 Point 1. 고대의 백령도 때는 ‘곡도(鵠島)’ 일명 ‘골대도(骨大島)’라 불려

 

삼국시대에 이 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고구려에 속했으며 ‘고니 곡(鵠)’, ‘섬 도(島)’자를 쓴 ‘곡도(鵠島)’라 불렀다. 오늘날 새와 관련된 백령도 지명 얘기는 모두 오리과(科)에 속하는 ‘고니 곡(鵠)’(천연기념물 제201-1호, 일명 백조)에서 비롯되거나 변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통일신라 제51대 진성여왕 때 거타지 설화에서는 ‘곡도’와 함께 일명 ‘골대도(骨大島)’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2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으나 곡도나 골대도의 표현과 뜻이 어찌됐던 오늘날 세간에는 곡도가 더 알려져 있다.

 

▶ 체크 Point 2. 고려시대 백령도 : ‘백령’ 지명이 처음 등장하다

 

‘백령’이란 지명은 고려시대에 처음 사용됐다. ‘백령’이란 명칭의 사용(『白翎鎭誌』)은 1010년(현종 원년, 제8대왕)이며 『고려사』 「지리지」에는 ‘백령진’은…(중략)…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진(鎭)으로 하였으며, 1018년(현종 9년)에 진장(鎭將)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에 이르러 지방제도의 정비와 관리를 파견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영향이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령’이란 작명의 연유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 사연을 알 수 없다.

 

결국 ‘백령진(白翎鎭)’은 ‘백령+진’의 합성어로서 백령도에 진(鎭, 군사시설)을 설치했다는 뜻이며, 지역 여건상 수군을 배치해 국가를 방어했기 때문에 백령(수군)진 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옹진군 최초의 수군 관련 군사시설로서 조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당시 고려는 5도 양계라는 지방행정조직 중 양계(兩界)라는 군사행정구역을 중심으로 28개의 진을 설치하고, 이 진들은 성곽으로 둘러싸고 무장했으며 독립된 전투부대가 있었다. 백령진의 경우 양계 지역은 아니나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준하는 군사시설을 갖추었을 것이다.

 

▶ 체크 Point 3. 당시 수군진과 관련된 자료에 대하여

 

수군진과 관련해 오늘날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것이며 문헌자료 이외에 고고학적 자료는 향후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첫째, 어떤 시설을 어디에 설치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양계에 버금가는 군사시설을 설치했을 것인데, 성의 위치는 진촌 천주교성당과 백령 길병원 자리 일대의 지대가 높은 곳이며, 주변에서 기와와 질그릇 조각들이 수습되고 있다. 성은 중심부에 돌을 쌓고 바깥은 흙으로 덮었는데(石心土城) 높이와 길이 등 규모와 축조방식, 건물지 등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둘째, ‘지명’이다. 지명은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현재 천주교성당 남서쪽 지역을 ‘성밑에’ 또는 ‘성밑의 마을’로 부른다. 성당 뒤쪽의 ‘동골몰(東谷村)’도 성을 쌓으면서 마을의 흙을 파서 사용하면서 골짜기가 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모두 성곽과 관련된 지명으로서 수군진 성터와 연관된 것이다.

 

셋째, 소재지인 ‘진촌’에 관한 얘기다. 이것은 ‘진(鎭)’+‘촌(村)’의 합성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촌’은 읍내로서 고려 시대 이래 (수군)진이란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촌락을 말하며, 이를 토대로 해를 거듭할수록 중심시설이 증가하면서 현재의 ‘진촌’으로 확장된 것이다.

 

따라서 군사시설로서 ‘진’의 지형적 특징은 자연재해나 외부 침입자로부터 은폐되고 안전한 내만된 지형과 군사 동원이 원활한 지역을 선택했던 것인데, 진촌리 일대가 안성마춤이었다. 즉 진촌은 용기원산과 용기포로 가려져 있으며, 해안에서 내륙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이민족과의 전투 준비 및 자연재해로부터 군사시설을 보호하는데 최적지였던 것이다.

 

나아가 옹진군 섬마다 ‘진촌’ 혹은 ‘진리’로 표현되는 지역은 주로 조선 시대에 군사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백령도 외에 덕적도, 장봉도가 대표적인 곳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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