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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15 - 박근원(朴根遠) 사진전

 

 1988년 7월1일, 막바지 창간준비에 한창이던 인천일보 사옥(지금은 없어진) 1층 편집국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이후 30년이 지나도록 글쓴이에게 박근원(朴根遠)은 ‘영원한 사진기자’다.

 

자그마한 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그의 명성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자연스레 알게 됐다. 선배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출입처, 특히 경찰과 소방관들 사이에 그는 인천의 유명짜한 기자였다.

 

“인천일보요, 박근원 부장 잘 있죠? 아 글쎄, 소방차 몰고 화재현장에 불 끄러 가면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때가 많다니까요.” 박근원은 그런 기자였다. 부지런하기가 으뜸이었고, 1970~90년대 인천의 사건·사고현장에서 그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힘들 정도였다.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89년 8월말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편집국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집 뒤 야산에서 견디기 힘든 악취가 난다는 옥련동 주민의 제보였다.

 

카메라 가방을 급히 둘러 메고 취재차량에 오르는 그를 따라 나섰다. 현장은 차에서 내려 100여m가량 떨어진 곳. 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반쯤 갔을까, 훅 끼쳐오는 역한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코를 틀어쥐었고, 난생 처음 보게 될 장면에 솔직히 겁도 났다. 발길이 주춤했다.

 

그 때 사체가 누워 있는 현장으로 초년병 기자를 이끈 것은 그의 따뜻한 격려였다. 어깨를 한 번 툭 쳐준 뒤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 글쓴이에게는 차라리 넓은 바다와 같은 거인(巨人)이었다.

 

우리나라 신문에 사진이 보편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3·1 만세운동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된 1920년대부터로 전한다.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컷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것이 던져주는 메시지와 울림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한다. 경계가 없다. 때론 빼곡하게 써 내려간 장문의 기사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또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가치관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장의 사진 한 장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다.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인류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네이팜 소녀’. 세계에 충격과 감동을 준 유명한 사진이다. 1972년 6월 베트남 전쟁 당시 AP통신 사진기자였던 닉우트가 찍은 것이다. 무차별적인 네이팜탄 포격으로 불 타는 숲을 뒤로 하고 공포에 질려 울면서 뛰쳐 나오는 아이들, 그 한가운데 온 몸에 중화상을 입은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벌거벗은 채 절규하는 모습... 전쟁의 참상과 비극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닉우트는 이듬해 저널리즘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신문기자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6년 8월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名譽의 우리 孫君 世界制覇의 凱歌’라는 제목 아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사진이 실렸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 있어야 할 일장기가 지워진 상태였다. 신동아에 실린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관련자들이 줄줄이 쫓겨나고 동아일보는 정간됐으며, 신동아는 폐간됐다. 이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 인천 영화학교 출신인 체육기자 이길용(李吉用 1899~?)이었다. 그는 앞서 1932년 8월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도 가슴의 일장기를 없애 버린 전력이 있다.

 

이길용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인천에 왔다. 영화학교를 졸업한 뒤 경인 간 기차를 타고 배재학당을 다녔다. 유명한 경인기차통학생회 일원이기도 했다. 일제 시대 반일 활동으로 몇 차례 옥고를 치렀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체육계 발전을 위해 애쓰던 중 6·25 때 납북됐다.

 

사진기자들의 세계는 거칠다. 기수 구분이 해병대 만큼이나 확실하기로(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유명한 언론사 안에서도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특히 엄격했다. 다른 회사 사진기자 선배들에게도 깍듯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앵글에 담기 위해 아찔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한다. 투철한 사명감과 직업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어느덧 80을 넘긴 나이, 반 평생 넘게 험난한 사진기자의 길을 걸어온 박근원 사진전이 4월13일부터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찰라의 인천’을 주제로 지역 언론사 기자로 뛰어다니며 찍었던 사진 49점이 걸려 있다.

 

옛 노점과 나들이, 학교 운동회, 장터 등의 정겨웠던 모습, 국제행사, 시대를 경악하게 했던 사건들, 1970~80년대 들불처럼 일었던 민주화운동 장면 등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담겨 있다. 그는 몇 년 전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사진 3000여 점을 인천시에 기증했다.

 

전시회는 시립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5월23일까지 계속된다. 관람은 무료다. 꼭 시간을 내서 지인이나 자녀들과 함께 들러 우리가 사는 인천의 지나온 모습을 한 눈에 담아보기를 권한다./ 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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