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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27 -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3)

백령도의 행정구역과 지명 변천(2)
고려~현대 행정구역 변화와 수군진의 흔적을 찾아서

 

 

 백령도의 ‘백령’이란 지명 유래는 1110년(고려 현종 원년)경에 백령진 설치와 함께 처음 언급되지만 의미와 기원은 문헌이 아닌 전설로만 전할 뿐이다. 그 후 진의 관리자로 진장(鎭將, 1118년 현종9)을 두었는데, 당시 고려 군사행정구역인 양계(東界와 北界) 지역에 속하지 않은 백령도에 군사시설인 진(鎭)을 설치했다는 점은 일찍부터 국가 해상 관리 차원에서 황해 연안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 체크 Point 1. 진(鎭) 시설물과 초기 모습은 어땠을까?

 

성에서 발생한 화재 기사에서 단면을 볼 수 있는데, 1051년(문종5)에는 성곽 화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백령진장(鎭將) 최성도와 부장(副將) 최숭망의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진은 성(城)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진장’과 ‘부장’이라는 직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성은 이 당시의 것인지, 그 이전 시대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자료 중 1043년(정종9)에는 성문 200여 칸, 창고 50칸, 민가 300칸이 소실됐다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성곽 및 주변 시설에 대한 피해 사실만 언급하고 있어 다른 시설물을 파악하기 위해 현재 백령도 진촌의 수군진 실태에 대한 조사가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 체크 Point 2. 고려말 섬을 비우는 쇄환정책(刷還政策) 실시

 

고려말 백령진에 변화가 감지된다. 즉 ‘백령진’을 1357년(공민왕6) 황해도 풍주(豐州) 문화현(文化縣)으로 옮겨가는데 이 때는 고려 말기로서 왜구의 창궐, 험난한 수로에 따른 방어의 어려움으로 백령진에 거주하던 주민들도 동시에 육지로 옮긴다(쇄환정책). 이 당시 백령도는 황해도 장연현으로 편입됐을 가능성이 크며, 주민이 떠난 백령도는 점차 황폐화하고 왜구의 소굴이 됐을 것이다.

 

또 고려 시대 백령도는 중국 산둥반도로 향하는 황해횡단 항로상의 중간 기항지 내지 해난 도피처의 가능성이 컸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북진정책으로 북쪽의 거란, 여진에 의한 육로 교통이 어려웠기 때문에 해상교통을 통한 송(宋)과의 외교를 폈던 공적 외교로였기 때문이다.

 

▶ 체크 Point 3. 조선 초는 황해도 장연현 소속, 그리고 1428년(세종10) 입도(入島)

 

조선 초에도 백령도는 장연현에 속하며, 고려말에 이어 황폐화가 진행됐을 것이다. 그후 1428년(세종10) 원주민의 입주 희망과 황해감사의 청원으로 백령진과 영강진을 합쳐 강령진 및 현(縣)을 새로 설치하고, 주민들의 백령도 입도를 허락했다.

 

진에는 첨절제사(약칭 첨사)를 두어 통치했는데 행정, 군사시설의 핵심 시설물은 육지에 있어 백령도를 관할했던 임시조치여서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약 200년 후 1609년(광해군 원년)에 체찰사(體察使) 이항복은 백령도에 대해 중국인 불법월경자, 해적약탈자, 피역자 등을 언급하며 방비강화를 위해 백령도에 진 설치를 강력히 주장해 마침내 진이 재설치된다.

 

그리고 진에 수군첨절제사(종3품)가 파견되는데, 첨사는 백령진이 폐지되기 전까지 군정은 물론 일반 행정까지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사법권까지 장악했다. 즉 행정, 사법, 군사권을 한 손에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어 일종의 첨사 행정인 것이다.

 

첨사 아래는 별초군관(別抄軍官), 기패관(旗牌官) 등의 장교가 있어 첨사를 보좌하고 수군을 통솔했다. 진촌리 남산 선정비군에 있는 첨(절제)사 권흥준, 이명석, 이보헌, 정수현 등이 이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런 제도는 1894년(고종31) 진이 폐지되면서 막을 내리고, 1895년 전국을 23부제로 재편할 때 황해도 해주부 장연군 소속인 동시에 기존의 첨사 대신 도장(島長) 중심의 행정 체제로 바뀌었다. ‘섬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도장’ 권한은 첨사에 비해 축소돼 군권은 없고, 죄가 큰 중죄자의 재판은 상부에서 결정했다고 하나 아직도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

 

즉 도장이 총 지휘하는 도장 행정인데, 진촌리 남산 선정비군의 임원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 해인 1896년에는 조선의 8도를 다시 13도제로 재편할 때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에 속했다. 그후 1910년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의 강제적 수탈을 위해 행정조직을 도장 체제에서 면장(面長) 체제로 바뀔 때까지 지속됐던 것이다. 광복 이전까지 9명의 면장이 근무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 황해도는 황해도 옹진군과 경기도 옹진군으로 나뉘는데, 38선 이남에 위치한 백령도는 경기도 옹진군 소속이 됐고 인천직할시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확대 재편될 때 옹진군으로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백령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의 18개 리(진촌 1~7리, 북포 1~3 리, 남포 1~2리, 연화 1~3리, 가을 1~3리)로 구성돼 있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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