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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28 - 백령도 전적비와 동키부대(1)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1주년이 되는 해다. 70년 전 한반도 전역이 총탄과 화약 냄새로 뒤덮혔지만 접적지역인 백령도의 이 시기는 아직도 다른 곳에 비해 남다르다.

 

과거 선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들이 도처에 있지만 그 중 ‘반공유격전적비’와 ‘동키부대’란 이름의 유적들이 돋보이게 눈에 띈다. 전쟁의 상처는 전사자 및 상해자는 물론 행방불명자와 황해도에 고향을 둔 실향민에게는 지울 수 없이 크게 남아 있다.

 

이맘 때 두무진과 장산곶 사이를 항해하는 선박이 70년 전 젊은 용사들의 전함으로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백령도의 전적비와 동키(Donkey)부대 얘기다.

 

▶ 체크 Point 1. 반공유격전적비(反共遊擊戰績碑)

 

이 비는 첨사 선정비군과 같이 백령면 진촌리 1184-1번지(남산)에 위치한다. 비석 전면에는 ‘反共遊擊戰績碑 大統領 尹潽善’, 뒷면에는 ‘檀紀 四二九四年 主宰 한국일보社’라 새겨져 있다.

 

안내판 내용은 ‘1950년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 당시 이곳으로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 왔으며 1951년 2월28일 UN군 관할 하에 8000여 명이 반공유격대(8240부대, 동키부대)를 조직, 황해도 일원의 기습작전을 수행하고 적 사살 4000명, 생포 57명 등 백령도 수호에 많은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 전공을 기리고 장렬히 산화한 516명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윤보선 대통령의 휘호와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의 협조를 받아 1961년 8월15일 이 비를 건립했다’고 안내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며, 관리번호는 14-2-05이다.

 

▶ 체크 Point 2. 유격군백호부대전적비(Monument of White Tiger Rangers)

 

백령면 진촌리 248-1번지에 위치한 이 비의 전면에는 ‘유격군백호부대전적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을 중심으로 주변을 애워싸고 당시 참전용사 명단을 새겨 놓았다.

 

안내판 내용에는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돌연한 참전으로 1·4후퇴하게 됐을 때 많은 북한 주민이 백령도로 피난했고 그 중 황해도 장연 출신 청년들이 백호부대(Donkey-4)를 창설했다. 이들은 서해일원에서 기습작전과 침투공작으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서해5도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했다.

 

1951년 2월부터 1954년 2월까지 계급도 군번도 없이 5610명의 북한 출신 유격대원이 공산군 3개 군단을 최후방에서 견제하는 전략적 효과를 거두는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한 백호부대(D-4) 전우 228명을 추모하고 행방불명자 83명, 전상자 120명을 위로하고자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바친 젊은이의 넋과 뜻을 기려 전적비를 세우게 됐다’는 내용이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며, 관리번호는 14-2-05이다. 아울러 이웃한 ‘망향탑(望鄕塔)’은 장연군민이 고향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988년 10월8일 건립한 것이다.

 

▶ 체크 Point 3. 백령도 동키부대의 흔적, 막사(幕舍)와 우물(白翎井)

 

막사는 백령면 진촌리 산671-1에 위치하며, 현재 1동이 남아 있다. 건립자는 동키부대원이며 한국전쟁 중에 건립됐다. 이 막사는 한국전쟁 당시 백령도를 중심으로 필사적인 반공투쟁을 전개했던 동키부대원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요즘의 비닐하우스 형태다.

 

백령정(井)은 막사 옆에 있으며, 1951년 7월30일 만들었다. 한미 연합으로 건립됐는데 건립자는 동키부대장 정용균, 패트릭(Patrick) 대위다.

 

이 우물은 동키부대원들이 백령도 사수를 위해 휴식과 전투준비를 하던 곳의 급수원이며 인근 주민과 함께 긴요하게 사용했다. 현재는 막사와 우물 주위에 철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안내판을 설치해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 체크 Point 4. 동키부대의 유래와 조직

 

동키(Donkey)는 ‘당나귀’란 뜻으로, ‘동키부대’는 1951년 미군이 지급한 ‘앵글로9’ 무전기의 모양이 ‘당나귀’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명 8240부대 혹은 KLO(켈로) 부대라 칭하는데, 백령도에는 동키부대원으로 활약한 분들의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현재 80대 중반 이상 되신 분들인데, 당시 16세 이상으로 구성된 이들은 어떤 활약을 했을까?

 

이미 1950년부터 시작된 한국전쟁 동안 압록강 하구에서 강화도에 이르는 서북해안 도서지역에는 반공청년 및 학생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유격대가 활동했는데, 이들은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을 계기로 고향에서 ‘치안대’ ‘청년단’ ‘학도호국대’를 조직해 반공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돌연 중공군의 참전으로 UN군이 후퇴하자 황해도 구월산 산악지역과 연안도서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유격투쟁을 벌였고, 1951년 이후 전쟁이 교착되자 UN군은 유격대에 주목했다. 인민(북한)군과 중공(국)군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지 지리에 밝은 유격대원들의 활동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 제8군은 이들의 활동을 원활하게 지휘하기 위해 3개의 부대를 창설하게 되는데 서해안 백령도의 윌리암 에이블기지(William Able Section)가 그 중 하나다. 윌리암 에이블기지에서는 서해안 지역 무장대원들을 규합, 유격연대를 편성해 지역 명칭을 부대명으로 사용했으나 1951년 3월 에이블 기지가 ‘표(표범, 豹 : LEOPARD)’ 부대로 공식 명명되면서 유격연대도 ‘동키부대’로 일원화해 건재순으로 숫자를 부여했다.

 

동키부대는 한국청년으로 구성됐지만 미군 소속으로서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미군은 한·미 간 협정을 체결해 유격부대를 한국군으로 이관한다. 즉, 1953년 8월12일 국방부 일반명령 219호로 창설된 국방부 8250부대 사령부가 유격부대의 인사, 행정, 포상 및 징계권을 이양 받았다.

 

현재까지 밝혀진 8240부대 조직은 모두 5개 연대, 30여 개의 유격부대이며, 부대 규모는 최대 4만2000여 명에 이른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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