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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고성(孤聲)] 정조의 죽음과 개혁의 좌절

 

 

1800년 5월 그믐에 정조는 교시를 발표했다. 오회연교(五晦筵敎)였다. 앞으로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하겠다는 정조의 야심에 찬 선언이었다. 재위 26년 만의 결단이었다. 즉위 초 조정은 결코 그에게 호락치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노론세력은 아버지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정조에 우호적인 남인과 소론은 미약했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 정조는 스스로 부하를 만들어 써야 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초계문신(抄啟文臣)이었다. 과거 급제한 자들 중 당파색이 옅은 젊은 인재를 선발해 규장각에서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킨 후 관직에 나가게 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정조는 조선 후기의 찬란한 진경문화시대를 열었다. 중국 일색의 문화를 조선중심으로 바꾸었으며 실생활에 적합한 실용적인 정책들을 개발해 위민정치를 실시하였다.

 

사병화되고 있던 오군영을 대신한 장용영이라는 조선 최강의 군대를 육성해 자주국방의 초석을 놓았으며, 신해통공을 반포하여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고, 수원 화성을 건립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득권 세력이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수도 한양을 천도할 구상까지 했었다. 심지어 그는 즉위하자마자 노비추세관을 폐쇄하는 등 장차 노비해방까지도 구상했었다. 주요 보직도 탕평책으로 일관해 남인과 노론 그리고 소론에서 각기 영의정을 8년씩 맡기는 정책을 썼다.

 

정조 초기 잔뜩 움츠렸던 기득권세력들은 그의 온화한 제스처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사사건건 반대하거나 방해의 강도를 높였다. 속으로 칼을 갈던 정조가 드디어 오회연교를 반포함으로써 향후의 개혁 일정을 예고하자 그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회연교는 솔교(率敎, 가르치니 따른다)와 교속(矯俗, 나쁜 습속을 바로잡는다)을 내용으로 그동안 영조를 계승해 의리의 탕평을 폈는데 앞으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정치를 하겠다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정조는 오회연교를 반포한 지 28일만인 6월 28일에 사망하였다. 학계에서는 과로사가 정설이지만 끊임없이 독살설이 퍼지는 이유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때문일 것이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와 6월 29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만남을 하루 앞두고 주상이 승하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선의 19세기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26년 동안 닦아놓은 개혁의 토대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조선은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가 충실한 신하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집어치워야 한다. 다시 권력을 잡은 노론은 그의 개혁정치를 하나도 계승하지 않았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이제 임기 1년 남았다.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총공세와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집권세력들. 점점 멀어지는 개혁의 모습을 보니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무는 형색이다. 황금같은 개혁의 시기를 다 보내버리는 집권당을 바라보며 또다시 19세기의 망국의 길이 되새겨지는 이유는 탁월한 지도자를 그리워 해서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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