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역사 속 최고의 선수를 꼽는다면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를 뽑는다면 한 사람의 이름만 거론된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던 선수, 2002 월드컵 4강의 주역, 이제는 별이 된 한국 축구의 영웅 유상철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1971년 10월 18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에서 태어난 유상철은 응암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에 진학해 1994년 드래프트 1순위로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당시 울산 현대를 이끌던 차범근 감독은 미드필더인 유상철에게 오른쪽 수비를 맡겼고, 그는 26경기에 나서 5골 1도움을 기록, K리그 베스트 11에 오르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치렀다. 1998년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꾼 유상철은 15골 3도움의 성적을 내며 득점왕에 올랐다.
유상철은 울산에서 보낸 9시즌 동안 142경기 37골 9도움을 올리며 1996년과 2005년 팀의 K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유상철의 멀티포지션 소화능력은 처음엔 독으로 작용했다. 여러 포지션을 맡은 탓에 주전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자신의 장점인 중거리 슈팅과 체력, 몸싸움 등을 최대한 살려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팀 핵심 선수로 발돋움했다.
1999년 일본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한 유상철은 초반 2시즌 44경기에 나서 24골을 뽑아내며 절정의 골 감각을 선보였다. 2001년에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홍명보, 황선홍과 한국인 3인방을 구축해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유상철은 대표팀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A매치 통산 124경기에 출전한 유상철은 18골을 넣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 대표팀 핵심으로 거듭난 그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골을 기록한데 이어,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 추가골을 넣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월드컵 첫 승리를 안겨줬다.
2005년 울산으로 복귀한 유상철은 이듬해 마지막 은퇴 경기를 갖고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 후 2011년 대전의 사령탑에 선임되며 그라운드로 돌아온 유상철은 울산대학교와 전남 등을 거쳐 2019년 인천 감독에 부임했다. 유 감독은 췌장암 판정에도 인천을 K리그 1 잔류로 이끌며 지도력을 보였다.
팬들은 그에게 ‘마지막 약속도 꼭 지켜줘’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유상철 감독은 “어떤 결과가 나오고 어떤 기적이 나올지 모르지만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인천 훈련장이나 경기장에 모습을 보이며 병세가 호전된 듯한 모습을 보인 유상철 감독. 많은 팬들은 머지않아 그가 복귀할 것이란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병마는 그를 놔두지 않았고, 투병 1년 8개월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축구계에 한 획을 그은 영웅은 7일 별이 돼 우리 곁을 떠났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