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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의 인천얘기 20 - 복막장어무화(福莫長於無禍)

 “9일 전부터 에디트가 에스파냐 독감을 앓고 있습니다. 지금 임신 6개월인데, 상태는 아주 절망적이며 목숨은 위태롭습니다. 저는 지금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겨운 가쁜 호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성관, 세계인문여행>

 

오스트리아 빈 화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화가 에곤 쉴레(1890~1918)가 어머니에게 보낸 짧막한 편지다. 1918년 10월 27일, 극진히 간호한 보람도 없이 결국 아내는 배 속의 아이와 함께 눈을 감았다. 나흘 뒤인 10월 31일 이번에는 그가 독감에 걸린 지 하루 만에 숨졌다. 28년 4개월의 안타깝고도 짧은 생이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가 총애한 제자이자 ‘천재’로 꼽혔던, 10년 만 더 살았더라면 세계미술사가 다시 쓰였을 수도 있다는 극찬을 받은 젊은 화가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쉴레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당시 전 지구적 대재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끝무렵이던 1918년 유럽에서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귀향하는 군인을 따라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미국 서부로, 이어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퍼지면서 온 세계로 확산됐다. 두 차례에 걸쳐 유행하는 와중에 2500만~5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수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4년여 간 계속된 1차 대전의 사망자가 1500만 명 정도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2차 때의 피해가 혹심했다. 사망자도 훨씬 많았고, 20~35세의 젊은층이 주로 희생됐다.

 

우리나라도 비껴가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에서는 ‘무오년 독감’ ‘서반아 감기’로 불렸고, 그 때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인구 1759만 명 중 288만 4000명이 감염됐으며 14만여 명이 사망했다.

 

전염병의 역사는 인류 고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전염병이 왕조나 국가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면 민족과 문명의 소멸을 초래하기도 했다.

 

안토니누스역병(천연두 또는 홍역)은 지도자가 무능과 방탕에 빠진 로마에 궤멸적 타격을 가하면서 결국 멸망의 길로 이끌었고, 1331~1334년 중국대륙에 창궐한 선 페스트는 당시 3명 중 1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바람에 원(元)제국 해체의 한 원인이 됐다.

 

스페인 식민침략자들에 의해 15~16세기 아메리카 신대륙에 상륙한 천연두, 홍역 등은 이후 200여 년 간 7000만 명 이상의 원주민들을 죽음에 몰아넣었고 결국 찬란했던 아즈텍, 잉카문명도 삼켜버렸다.

 

이어 1830년대 산업화가 초래한 콜레라가 범세계적으로 유행했고, 스페인 독감의 광풍이 지나간 지 30년이 채 안 된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이 잇따라 발생해 수 백만 명이 사망했다.

 

이후 에이즈(AIDS), 사스, 조류독감, 신종플루, 메르스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전염병은 날로 지능화하고, 강력해진 균으로 무장한 채 인류를 끊임없이 공격해대고 있다.

 

세계적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84) 교수는 1997년 출간, 퓰리처상을 안겨준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어떤 민족들은 왜 다른 민족들의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했는지, 신대륙 원주민들은 어떻게 유라시아인들에 의해 도태됐는지, 각 대륙에서 문명 발달 속도의 차이는 왜 생겨났는지, 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명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등 의문을 명쾌하게 분석했다.

 

그는 문명의 불평등을 낳은 주요 요인으로 무기, 금속과 함께 병균을 꼽았다.

 

최근 인천의 코로나19 기세가 무섭다. 하루 확진자 수가 오랜 동안 유지돼온 선을 넘어 며칠전부터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초등학교, 주점 등 곳곳에서 집단감염이 잇따르고 있다.

 

델타변이 감염사례도 무더기로 나와 방역 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시내 곳곳에 마련된 선별진료소에는 불안한 마음에 검사를 받으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밀려들고 있다.

 

박남춘 시장도 상황의 엄중함을 인식,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도권 특별방역점검회의에서 인천의 현황을 보고하고 질병관리청 역학조사관 파견 확대와 백신 추가물량 배정을 긴급 건의했다.

 

힘겹고 답답한 시간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엄혹한 세월이다. 이런 때일수록 ‘배려’가 필요하다. 가족과 동료, 주변과 사회, 나아가 국가를 위한 나의 배려. 물론 나를 위한 나의 배려는 필수다.

 

또 희망과 믿음은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놓아서는 안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다양한 전염병과 싸워왔다. 미국의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제니퍼 라이트가 쓴 책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는 끔찍한 고통과 희생이 수반됐지만 결국 인간이 전염병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마다의 배려가 모여 우리, 그리고 사회가 하나 돼 함께 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책은 전해준다. 지도자의 리더십, 정부 당국의 대처, 언론의 역할도 막중하다.

 

복막장어무화(福莫長於無禍). 복은, 화가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순자(筍子)’에 나온다. 이 말의 의미가 새삼 절실하게 와 닿는 요즘이다. / 인천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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