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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37 - 백령도 기독교 전래 이야기(1)

 백령도 서남쪽 조그만 포구, 정겹지만 백령도 나아가 우리나라 근대문화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교회사에 한 획을 그었던 중화동 교회다.

 

‘19세기 조선시대 당시 중화동에 터를 잡고 고구마 이외 농사가 잘 되지 않았던 척박한 토질을 알고 있었다면 교회가 뿌리를 내렸을까?’라는 생각에 포구의 위대함마저 든다. 어느덧 역사는 한 세기가 훌쩍 지나 당시의 인걸은 간데 없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자취와 그림자가 중화동 골목을 맴도는 것 같다. 백령도의 기독교 전래와 관련된 초창기 이야기를 살펴보자.

 

▶ 체크포인트 1. 양천(陽川) 허씨(許氏), 백령도와 인연을 맺다

 

지금부터 약 1100년 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전투할 때 공암촌(孔岩村)에 살던 허선문(許宣文)이라는 지주가 군량미를 후원한 바 있는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허선문의 공로를 인정해 공암촌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고, 허선문을 ‘시조’로 하는 양천 허씨가 생겼다.

 

허씨 가문의 역사적 인물로는 ‘홍길동전’을 저술했던 허균, ‘동의보감’을 저술했던 허준, 조선 중기 서인의 송시열과 라이벌이었던 남인 출신의 미수(眉叟) 허목(許穆) 등이 있다.

 

백령도와의 인연은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있었던 ‘종침교(琮琛橋)’라는 다리와 연관이 있는데, 이 다리 이름은 조선 전기 허종과 허침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이 중 허침에서 비롯된다. 허침의 현손인 허종(許鍾 1752~1816)이 백령도 첨사(僉使)의 책실(冊室, 비서 혹은 수행원)로 백령도에 들어가면서 백령도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증손자 허득(許得 1827~1901)이 백령도 일대에 기독교를 처음 전했다.

 

허득은 백령도가 국가요새인 점을 감안해 군함 제조, 군인 양성, 군마 사육 등 국가의 국방사업에 협조했고 희생적 공헌으로 1891년 정부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3품)의 관계(官階)를 받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의 관직에 올랐다.

 

한편 19세기 중엽 황해도 일대에 민란이 일어났을 때 중화동 허득에게 정3품의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의 문관직을 내린 것은 백령도 민심을 안정시킬 명분을 주기에는 충분했을 정도로 백령도에서 그의 학식이나 인품은 최고의 경지였다. 그는 임명된 후 백령진 첨사의 자문역을 맡아 백령도의 안보 및 지역 발전에 힘썼으며, 1896년 동학농민운동을 거친 후 백령도로 귀양 온 김성진과 만나 기독교 신앙의 씨앗을 뿌리게 됐다.

▶ 체크포인트 2. 서양인들의 백령도 및 그 일대에 대한 선교 노력들

 

H.J.Clifford(클리포드) 해군 대위와 Basil Hall(바실 홀)

 

1816년 두 척의 영국해군 함정이 영국을 출발한다. 한 척은 맥스웰(Murray Maxwell) 대령이 지휘하는 알세스트(Alceste)호, 다른 한 척은 바실 홀(Basil Hall) 중령의 리라(Lyra)호였다. 조선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영국 해군은 조선 서해안의 해안도(海岸圖) 작성을 위한 정보 수집이 목적이었다.

 

그 해 9월 1일 백령과 대청의 중간 지점에 정박하고 맥스웰 대령, 바실 홀 중령, 클리포드 대위, 브라운 해군 생도 등이 종선으로 갈아타고 해안 시찰에 나서 처음 접근한 곳이 백령도 중화동 포구였다. 영국군과 진(관)군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지만 그들 중 클리포드 대위는 선교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움직였다.

 

리라호 함장인 바실 홀은 1818년 ‘조선서해탐사기’란 책을 내면서 클리포드의 비망록이 직접적 도움이 됐다고 밝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는 클리포드 해군 대위가 쓴 바망록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비록 자신이 비용의 반을 부담하기는 했지만 해군성으로부터 나와 동행하도록 허락을 받은 이 장교는 특별한 의무가 없었으므로 완전히 지식의 획득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항해 중에 일어난 많은 재미있는 일들을 기록하는 것은 그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수많은 의무 때문에 관찰하고 기록할 틈이 없었는데 그가 그일을 맡아 주었다…모든 지도와 도표, 항해 기록은 부록에 넣었다…나는 이 부록을 작성하면서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데 클리포드씨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다…류구(현, 오키나와)의 어휘 사전은 전적으로 클리포드씨가 만들 것인데, 일상 쓰이고 있는 낱말과 문장을 수집하느라고 그는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체류가 기간이 짧아 이 부분은 아주 불완전하지만 바라건데 앞으로 이곳을 여행하는 어떤 사람이 토착민들과 대화하면서 그것이 크게 되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처럼 ‘조선서해탐사기’의 대부분 기록을 클리포드가 담당했을 뿐 아니라 주민에게 성경을 전달하는 선교활동을 펼친 것 역시 클리포드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로 탐사와 더불어 이뤄진 선교 가능성 타진은 이렇게 백령도에서 처음 시도됐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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