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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39 - 백령도 기독교 전래 이야기(3)

 백령도 중화동(中和洞), 행정구역은 연화2리. 이 지명에서도 신앙의 향기가 풍긴다. ‘중(中)’은 ‘가운데’, 즉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으며 치우침이 없는 올바른 덕(德)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이 신앙의 자세로 강조하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이자 신앙인 것이다.

 

화(和)는 ‘화(禾)’와 ‘구(口)’의 합성어다. ‘화(禾)’는 나무 줄기에 이삭이 드리워진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로 가장 좋은 곡물인 벼, 곡식 등의 열매를 의미한다. ‘구(口)’는 어귀, 관문, 먹는 입, 말하는 입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합하면 ‘화(和)’는 ‘말씀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결국 ‘중화’는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믿음으로 말씀의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중화동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지명 자체가 신앙과 밀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 체크포인트 1. 중화동교회의 초창기 예배 모습

 

1897년 서경조 장로가 첫 예배를 드렸던 곳은 서당을 겸했는데, 최근에 간행된 ‘만성 허응숙 목사’(보고사)에 기술된 내용을 소개한다. 서당 겸 예배당은 초가집이었으며 후에 함석집으로, 또 그 후에 벽돌 기와집으로 개축하기를 네 차례, 그러나 본래 시작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백령도 교회는 그 후 소래교회에서 들어온 서경조, 언더우드 등 전도인들을 통해 복음이 더욱 힘차게 전파됐는데, 당시 교회 운영은 서양식이 아니라 유교식이었다.

 

그 때 예배 전후의 장면을 보면 “중화동교회 초창기에는 교인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교회에 나왔다. 그 당시 중화동 마을 집집마다 일 년 동안 피울 담배를 재배해 잎담배를 줄로 엮어서 건조시켜 그 잎담배를 칼로 잘게 썰어서 쌈지(담배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담뱃대를 이용해 피웠다.

 

그러기에 교인들이 교회에 나올 때에도 담뱃대와 쌈지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교회에 온 교인들은 일단 교회 앞뜰에서 담배를 피우고, 교회에 들어갈 때는 가지고 온 담뱃대를 처마 밑에 나란히 꽂아놓고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는 다시 나와서 처마 밑에 꽂혀있는 자기들의 담뱃대를 찾느라 한참 동안은 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마다 자기의 담뱃대를 찾아 가지고는 담배를 피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예배 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한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담배를 피우며 돌아갔기 때문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인들의 행렬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고 하니 당시 모습에 정감이 가며, 신앙의 자세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 후 전도인들의 복음 대중화는 많은 열매를 맺어 중화동 교회에서 사곶교회와 진촌교회가 처음 갈라져 나가고 연지교회, 가을리교회, 화동교회, 북포리 중앙교회, 장촌교회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백령도 교회 개척자인 허득(1827~1901) 옹은 처음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평교인으로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면서 봉사했다. 교회에서 처음 영수직을 받은 이는 그의 아들 허윤씨이고, 처음 목사가 된 분은 허득의 장손 허간 목사다.

 

 ▲체크포인트 2. 서양인들의 백령도 및 그 일대에 대한 선교 노력들

 

 -1865~66년 2차례 방문한 R. Thomas(崔蘭軒)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는 1839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고향 하노바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해 7월 런던선교회로부터 파송돼 12월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가정 및 직장 내 어려움으로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내고 산둥반도 지푸 주재 중국 해상세관장으로 있던 영국인 하트(R. Hart)의 통역관으로 채용됐다.

 

그 과정에서 조선국 선원들을 접촉하고 조선 내에서 프랑스 신부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그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주재원이었던 윌리암슨(A. Williamson)의 중재로 조선인 천주교인 김자평(金子平)과 최선일(崔善一)을 만난 후 다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1865년 8월 31일 토마스는 사표를 내고 윌리암슨의 도움으로 9월 4일 지푸를 떠나 우문태(宇文泰, 청국인)의 범선을 타고 김자평의 안내를 받아 9월 8일경 백령도 두무진에 도착했다. 조선군은 청나라 선박이라는 점을 고려해 너그럽게 대했고 그 사이 성경책과 전도 문서를 전했으니 백령도의 첫 번째 선교 활동이었다.

 

이렇게 선교 경험을 하고 복귀한 토마스는 인생의 황금기를 맞게 되고, 2차 방문의 동기가 된다. 그는 북경에서 매년 조선의 사절단 중 동지사(冬至士) 일행이 북경에 체류한다는 소식과 함께 동지사로부터 자신이 뿌렸던 성경책이 평양으로 파급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차 방문은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교섭을 위한 조선을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승선해 마침내 중화동 포구에 도착했으니 백령도는 두 번째 상륙하는 셈이다. 토마스는 한국말로 인사말을 전했고, 주민과 대화를 나누었다. 주민들은 신기해하면서 서로 말을 걸어 보려 했고, 그 와중에 성경책을 전했다.

 

그는 평양 대동강가까지 올라가 통상과 선교 활동을 하려 했으나 관군과 마찰(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고, 1866년 9월 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그토록 선교 활동을 원하던 조선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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