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길은 이거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조국 해방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야. 걱정마, 나 안 죽어. 살아서 조국 해방 꼭 두 눈으로 볼 거야.”
1926년 6월, 조선식산은행 폭탄미수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차례로 붙잡혀 감옥으로 들어왔다. 목숨을 내걸고 거사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난 후였다. 도대체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기억과 상황을 더듬어 간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들은 거센 심리적 갈등에 몸부림치게 된다. 바로 ‘너희의 배후를 한 명이라도 적으면 살려 주겠다’는 종이 쪽지 한 장씩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살기 위한 갈등인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의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 무대에 오른 ‘프로젝트 엘’의 연극 ‘그날 밤’은 이렇듯 추리와 심리, 서로 의심하는 와중에 극이 진행된다.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이도 있고, 또 간절히 살고 싶다는 인물의 이야기도 그려진다.
박제영 연출은 “그 당시 실제로 폭탄을 던진 다음 불발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석주 열사도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고, 다른 건물로 넘어가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불발이 됐었다”면서,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 했지만 그 마저도 일본군에게 제지를 당해 실패하고 감옥에서 순국하신 사건을 모티프로 잡았다”고 말했다.
나석주 열사의 이야기를 주제로 잡은 이유에 대해 민병훈 작가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군들이 폭탄을 많이 이용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폭탄테러는 정말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고 한 행위가 아니겠느냐”면서 이분들의 숭고한 죽음을 복원하는 의미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 강점기에 관련된 일들을 일상생활에서 잊고 사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상기하는 게 중요하고 알아야 될 부분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유명진 대표는 “이 작품을 하면서 굉장히 놀란 부분도 있고, 근현대사에 대해 많이 배우고 탄탄해진 느낌”이라며 “근데 지금 젊은 친구들, 저희 크루 중에 갓 20살이 된 친구도 있고 어린 친구들도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모른다. 그런 부분에서 ‘문화가 더 쉽게 풀어준다면’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소개했다.
얼마 전 공연을 보러왔던 어린 관객들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관심이 생겨 책도 구매하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기까지 했다는 얘길 들었다면서 좋아하는 유 대표의 얼굴에선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젊은 사람들이 귀감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 마지막에 ‘아무리 개개인이 아무렇지 않아 보일지언정 개개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란 대사가 있다”고 부연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이 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녀다. 역사도 그 중 한 부분이고, 계속해서 사회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겠다는 심산이다.
“젊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선 어떤 행동들이 필요할까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꼭 역사물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에 필요한 소리가 있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젝트 ‘엘’은 2020년 만들어진 신생극단으로, 엘이란 단어는 불어로 날개라는 뜻이다. 이는 극단을 거쳐 간 사람들이 날개를 달고, 또 공연을 본 관객들 역시 훨훨 날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움직임 연극을 지향하고 있는데, 한국사람들에겐 다소 어색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서사를 풀어내는 극단인 것이다. 다만, 이번 작품 ‘그날 밤’은 정극에 가까운 스타일로 제작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유 대표는 “사실 이 작품은 7년 전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공연으로 한 번 올린 적이 있다. 그때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힘이 있고 이 시대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무언가로 다가와 언젠가 꼭 다시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박 연출은 “과거 작품과 가장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 포인트는 심리전이 더 강해졌다는 부분과 친일파라는 캐릭터가 생긴 것”이라며, “예전에는 단순히 일본에 지배당하고 있는 조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그 안에서 변절하는 배신자가 나타나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회유시키려고 하는지에 대한 장면이 많이 추가됐다. 또 그 안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무대 위에는 거대한 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담았다고 이은석 무대감독은 설명했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 너머의 모습은 절대 볼 수도, 갈 수도 없을 것 같은. 이 문은 절망적이고 막막했던 일제강점기(현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은 독립(미래)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조명디자인은 특히나 돋보였다. 이차훈 조명감독은 “감옥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사실적인 빛의 바탕을 의도함과 동시에, 공간간의 대비와 인물의 일상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의로운 희생이 보일 수 있도록 빛에도 메시지를 담았다고.
그날 밤이 느껴지는 음악도 작품에서 한 몫 한다. 피아노와 저음의 현악기 울림을 바탕으로 표현된 감정선이 아름답고도 슬프다. 김요찬 음향 감독에 따르면 시대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는 클래식으로 익숙했던 소리들을 응용해 무거움과 묵직함으로 베이스를 설정하고, 이것과 조화롭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멜로디를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젝트 엘 안에서는 ‘마더블루’라고 해서 임신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크게 3가지 카테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청년에 대한 이야기, 환경에 대한 이야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문제거리 등이다.
또한 ‘마더블루’란 작품 이외에도 환경과 인권에 대한 부분을 담고 싶어 ‘신인류’란 작품도 계획 중에 있다는 게 유 대표의 말이다.
민병훈 작가는 “초고를 쓰고 첫 공연을 한 지 7년이 지났다. 무수한 말과 의미 사이에서 다시 극을 고치고 또 고쳤다. 시간이 쌓여 말이 되는 것, 그것은 역사뿐”이라며 “우리는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말들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여기 도착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끊임없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며, 투쟁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그들의 정신은 과연 지금 세대에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연극 ‘그날 밤’은 역사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