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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50 -남포리 장촌(長村) 이야기

 대청도가 가깝게 바라보이는 백령도 남쪽 해변가. 주변 산세에 둘러싸여 아늑한 대지의 품에 터를 잡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장촌 마을. 행정구역상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남포1리에 속한다.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랜 역사가 있는 마을로 3면이 산이며, 앞쪽으로는 바다와 접한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2021년 1월 기준 117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지만 1970년대는 600여 명의 제법 큰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까?

 

▶ 장촌(長村) 그리고 남포리(南浦里) 지명 유래

 

장촌 마을은 뒤쪽이 석장골산 일명 뾰족산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앞(남쪽)으로는 석장골산 밑에서 시작된 개울이 해안까지 마을 중간을 흐르며 개울 좌우 편평한 대지에 가옥들이 자리한다. ‘장촌’이란 지명은 해안으로 길게(長) 분포된 집들로 마을(村)이 형성됐기 때문이며, 경작지도 간척에 의해 넓게 분포한다.

 

혹자는 ‘장촌’이란 지명 유래가 장씨의 집성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내용이며, 촌락의 분포와 관련된 것이다. 옛날에는 마치 삼태기와 같은 지형이라 하여 ‘삼치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의 행정구역명인 ‘남포리’ 명칭은 조선 광해군 때 백령진(白翎鎭)이 재설치된 이후 1894년(갑오개혁) 폐지될 때까지 약 300년 사이에 진내면, 북면, 남면의 3개 면으로 재편될 때 이곳은 ‘남면’이 되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장촌과 화동의 공통점이었던 포구를 합쳐 ‘남면’의 ‘남(南)’, ‘포구’의 ‘포(浦)’를 빌어 화동(化洞) 부락과 함께 ‘남포리’가 됐다고 전한다.

 

장촌 포구에는 방조제와 방파제가 축조돼 어선이 정박할 수 있는 작은 어항으로서 근해에서 봄철에는 까나리잡이, 가을철에는 주로 삐뚜리 소라, 놀래미 등 통발 어업을 주로 한다. 주변 포구에 비해 큰 배가 많아 선상 낚시를 하며 우럭을 많이 잡는다.

 

바다 건너편에는 이웃한 대청도 삼각산이 눈앞에 가까이 보이며, 바다 가운데는 ‘심청’ 전설과도 관련 있으며 최근 점박이물범의 서식지인 연봉(蓮峯) 바위가 솟아있다. 흔히 지역에서 연봉 바위하면 장촌 앞바다를 말한다.

 

▶ 장촌 마을 형성

 

이 마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전언에 의하면 400년 전이라는데 초창기에 터를 잡았던 성씨는 김해김씨, 나주장씨, 전주이씨, 영암최씨 등이 대표적이며, 박씨·조씨·서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장촌에서 제일 먼저 정착했던 김해김씨 입도조(入島祖)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황해도 장연(長淵) 땅에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400년 전 배를 타고 백령도를 건너와 제일 먼저 정박한 곳이 장촌 앞 해안인 ‘김촌말’이었는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양지가 바르며, 바다와 접해 있어 살만하다고 생각한 끝에 배에서 내렸다”고 전한다.

 

그 정착지가 바로 ‘대루’인데 대루란 흙과 돌 혹은 나무를 이용해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구조물로 당시 살림터를 닦기 위한 시설이 옛 지명으로 정착된 것이다.

 

마을의 거주 분포를 성씨별로 보면 해안가부터 김씨가 모여 사는 ‘김촌말’ 중앙부에 나주장씨, ‘웃골 마을’ 혹은 ‘이촌몰’이라 불리는 장촌교회 일대가 이씨가 거주하는 분포를 보이는데 이것은 마을 주민들의 정착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해안가부터 마을 정착순으로 살게 되는데 김해김씨, 나주장씨, 전주이씨가 차례로 해안가부터 정주했음을 보여준다.

이곳엔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천년송(赤松)’이라 불리는 400년 된 보호수(2000년 4월 20일 지정)가 있는데, 조선 선조 때 마을이 형성되면서 당시 거주민들이 심었다고 전한다. 천 년 동안 주민과 함께 백령도를 수호하길 바라는 마음에 지어진 이름인데 높이 15m, 둘레 2.9m이며 수려한 자태를 뽑낸다. 현재는 목책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나주장씨의 선산에 위치한다.

 

▶ 장촌의 종교와 교육

 

마을 주민들의 하나된 마음과 마을의 이어진 내력은 두터운 신앙심도 한몫 했는데 기독교 장로회와 가톨릭 공소가 대표적이다.

 

‘윗 마을’에 있는 장촌교회는 1952년 8월 16일 건립됐고, 당시는 황해도에서 백령도로 월남한 교역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초기 창립 교인으로는 박상준, 주병준, 장두훈, 장효순, 최병수, 박옥련, 장익춘씨가 있다.

 

초창기에는 구 경로당(공회당터)에서 시작됐으며 1962년 12월 7일 현 부지에 30평 성전을 건축했고 초대 주윤길 전도사, 2대 김문선 전도사가 수요일, 일요일마다 방문해 시무했다. 아울러 1960년대 건립된 천주교 장촌공소도 있다. 역대 공소회장은 김정찬, 김관도, 김준영이 맡고 있으며 대부분 고령층으로서 어업 및 농업에 종사한다.

 

섬 지역의 작은 포구이지만 교육열은 대단하다. 1930년 대에는 ‘간이학교(簡易學校, 교장 장영국)’가 있었고, 2년을 마치면 진촌으로 유학해 보통학교 과정을 이어갔다. 해방 이후 남포초등학교가 1950년대 중반에 설립 운영되면서 매년 30~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점차 학생수가 감소하면서 1993년 폐교됐다.

 

한적한 어촌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배움의 기회는 열려 있었고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공교육을 담당하는 마을 단위 학교의 설립은 장촌 주민의 대단한 교육열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 장촌의 인물

 

대표적 인물은 장익현(張翼鉉, 1918~2000)씨가 있다. 그는 용호도수산학교(龍湖島水産學校, 현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령도 어업조합이사, 백령중학교 설립, 백령면장(1955~58), 옹진군 내무·산업과장을 역임했다.

 

특히 4·19 혁명(1960년)으로 우리나라 헌정사상 민의원, 참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를 실시할 때 1960년 7월 29일 국회의원 선거 무효판결로 실시한 재선거에서 경기도 옹진 무소속으로 출마, 민의원(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돼 역대 최단기간인 9개월 18일 만에 임기가 종료됐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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