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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칼럼] 백스테이지 청와대? 그게 가능하겠어?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람, 일본사회가 저 지경이 됐구나, 사회에 유대/ 연대/ 소통/ 배려/ 공동의 삶이란 게 거의 없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세대간에 같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세대끼리는 이미 단절된 지 오래다. 혼다 영업사원이 와서 모모코에게 경차를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혼다는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혼다를 사면 적어도 6개월의 한 번씩은 혼다 직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아들이 돼버린 사회. 우리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80년대 학번 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기득권층으로 몰리게 됐는지, 언제부터 모두들 2030 2030 하면서 그들의 눈치나 보게 됐는지,언제부터 젊은이들 상당수가 극우와 보수(윤석렬과 홍준표)를 구별하지 않고 정권만 바꾸면 ‘땡큐’인 심리가 됐는지, 언제부터 모두들 부동산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게 됐는지, 이런 식이면 우리사회는 모두 다 각자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투의 극단의 개별화된 사회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상식을 되찾으면 된다. 검사라는 직업의 상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텔레그램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고 전화 녹취록까지 공개돼서 자신이 범죄를 사주했거나 적어도 모의에 동참한 사실이 밝혀지면 내가 그랬다,라고 고백하는 게 상식이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에게 항상 들었던 이야기는 너희가 잘못한 것보다 거짓말한 것 때문에 더 화가 나, 이다. 일부 검사들의 이런 행태는 사람들이 유년시절부터 키워 왔던 상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사람 한 명의 의식이 잘못 뚫리고 왜곡되면 사회 전체의 망이 해체된다. 손준성, 김웅처럼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얼마나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자신들 욕망대로 사회가 구성되고 재편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거의 악마의 수준이다. 이러니 우리말에 처단이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다. 과거 북한 공산당이 지주라 하면 무조건 대나무 꼬챙이로 찔러 죽였다며 반공교육에서 비난의 수위를 극대화 시켰지만 사실 그 지주들 중에 소작농의 어린아이가 굶어 죽는 것조차 본 체 만 체 했던 인면수심의 인간들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보수는 몰상식과 인격 수양, 자기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진보는 자칫 인간성을 상실할 수 있는 극단적 폭력에의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그쯤 되면 양자는 같아진다. 그러니 보수는 올바른 상식을 되찾아야 하고 진보는 좀 적당히, 늘 앞섬과 뒤처짐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헤아리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 마디로 모두들 좀 실용적이 돼야 한다. 그리고 좀 문화적이 돼야 한다.

 

버락 오바마가 잘했던 일 중 하나는 백악관에 ‘백스테이지 앳 더 화이트하우스(Backstage at the Whitehouse)’란 이름으로 각종의 가수들을 불러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테데스키&트럭스 밴드의 수잔 테데스키와 데릭 트럭스 듀오도 왔었고 에이미 만도 와서 자신의 메가 히트곡 ‘새이브 미(Save me)를 불렀으며 심지어 비비 킹도 작고하기 전에 롤링 스톤즈 믹 재거와 함께 이 무대에서 신나게 한판을 하고 떠났다. 비비 킹이 오바마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독촉하는 장면은 정치가 때론 좀 놀고, 평민들과 어울리며, 그래서 잠깐이나마 상식적이 되고, 또 그래서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치가 좀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울대 식의 오만에서, 고시 패스의 자폐적 심리에서, 판검사의 막무가내식 눈높이에서, 언론고시의 기계적 지식에서, 의사들의 비뚤어진 에고(ego)에서 내려와야 한다. L시티와 대장동 수천억원의 욕망도 일반 사람들의 눈높이나 서민의 생활과 의식으로 종종 내려와야 한다.

 

청와대에 백스테이지를 만들어 공연을 할 그릇은 지금 후보들 중 누가 지니고 있을까. 이날치를 청와대에 불러 같이 노래할 수 있는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 그 모든 것은 꿈인가. 다들 각자, 나는 나대로 혼자서만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 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고독하고 쓸쓸하게 죽을 것인가. 그런 사회를 만들 것인가. 비록 트럼프는 극혐하지만 힐러리도 싫어서 투표를 포기했던 미국의 2016년 대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격은 상식에서 나온다. 상식의 인간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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