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인천 섬을 가다 59 - 백령도의 문호(門戶), 용기포 이야기

 

 백령도 면소재지인 진촌에서 남동쪽으로 약 2㎞ 거리의 해안에 자리 잡은 아늑한 포구, 용기포(龍機浦)! 백령과 인천 간을 왕래하는 쾌속여객선을 비롯해 많은 배들이 드나드는 백령도의 문호(門戶)다.

 

용기포는 마을이 형성돼 있는 구항의 소용기원산과 끝섬 전망대가 있는 대용기원산으로 이뤄졌는데, 원래는 두 곳 모두 섬이었으나 백령본섬과 용기원산 사이에 모래가 쌓여 사주(沙洲)로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인 것이다.

 

‘용기포’은 구항과 신항으로 나뉘는데, 두 항구는 언제부터 출입구 역할을 했을까? 구항은 100여 년 전 어선 중심의 포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으며, 세월이 흘러 구항이 협소하고 대형선박의 접안이 어려워 2012년 구항 북쪽에 신항을 준공하면서 과거 구항의 출입구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현재 신항은 용기포 여객터미널과 해양경찰서가 있다.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진촌5리이며, 2021년 1월 현재 87세대 123명이 거주하고 있다.

 

▶ 지명유래

 

‘백령진지’ 산천조에 대용기원(大龍機院)과 소용기원(小龍機院) 등의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용기포 뒷산은 소용기원산이고 그 북쪽 바다 가운데로 뻗어와 끝에 산봉을 이룬 것이 대용기원산(해발 136m)이다.

 

용기포는 소용기원산 밑에 있는 포구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620년 이대기(李大期)의 ‘백령도지’에 용기포를 언급하고 있는데 “백령도는 동쪽인 용토로(龍吐露)에서 서쪽 두모진(頭毛津)까지 40여 리”라는 기록에서 용토로는 오늘의 용기원산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토로는 진촌 서쪽의 두룡산(頭龍山)을 용의 머리 부분으로 보아 마침 용이 토해낸 물체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용기원은 ‘용틀원’의 ‘용 용(龍)’과 ‘틀 기(機)’자를 써서 한자화한 것으로 당초의 ‘용토로’가 ‘용틀원’, ‘용틀안’으로, 그리고 다시 ‘용기원’으로 변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 용기포 여객터미널 주변 소개

 

백령도에 발을 디디면 30~40m의 수직 암벽 등 규암질 해안 지형이 눈을 사로잡는다. 자연지리나 지질학 연구자의 보물섬처럼 해식 절벽, 층리와 절리, 단층, 노두와 전석, 그리고 연흔(漣痕, 물결무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연의 섭리를 볼 수 있다.

 

여객터미널 옆 야외 쉼터에는 백령도를 대표하는 조형물이 있는데 원으로 돌아가며 두무진과 같은 해식 절벽을 표현했고, 그 안에 점박이물범과 심청 조각상을 배치했다. 한편 뒷산에는 폐기된 등대가 있는데, 60년 전인 1963년 설치돼 까나리와 노랑가오리 등을 잡는 어선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불빛이 간첩의 해상 침투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1974년 가동이 중단됐다.

 

등대 밑에 있는 등대 해변은 다양한 자연현상은 물론 물놀이 및 관광명소로 유명해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장소다. 구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용기포 마을에는 특산물인 까나리 액젓을 담아놓은 통들이 즐비하고, 초도 등 이북 출신이 많았기에 통일 염원을 돌에 담아 만든 ‘통일염원탑’이 있다.

▶ 용기포항의 법적 지위와 연락선

 

항만법에 따라 용기포항은 외항선이 입·출항하는 무역항이 아니라 주로 국내항 간을 운항하는 연안항에 속한다. 연안항 가운데서도 지방관리가 아닌 국가관리 연안항에 속한다. 국가관리 연안항은 국가 안보 또는 영해 관리에 중요하거나 기상 악화 등 유사시 선박의 대피를 주목적으로 하는 항만으로 국가의 우선 지원을 받는 자격을 갖고 있다.

 

용기포항을 거친 연락선은 어떤 배들이었을까? 해방 전후에는 황해도 장연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위해 드나들었으며, 6·25 이후에는 열악한 시설에 목숨을 담보로 생사를 넘나들며 인천을 왕래했다.

 

불운하게도 선박의 침몰로 안타깝게 생명도 희생됐고, 열악한 의료시설 속에서도 돌발적으로 배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박 이름을 본떠 아이의 이름을 짓고, 새 생명의 행운을 빌었다.

 

인천부터 백령까지 소요 시간은 과거에 2박 3일 걸렸으나 최근에는 4시간 이내 도착하니 놀라운 변화도 있었다. 단지 고령화된 도서로 변하면서 기상에 따른 빠른 대처가 어려워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생기니 안타깝다.

 

해방 이후 용기포항을 드나들었던 배의 이름(船名)은 다음과 같다. 표탄환, 한성호, 조일호, (이근호→백령호), 한려호, 은하호, 황진호, 옹진호, 새경기호, 데모크라시호(1호, 2호, 5호), 아일랜드호, 페가서스호, 컨티넨탈호, 만다린호, 마린브릿지호, 프린세스호, 씨호프호, 하모니플라워호, 코리아킹호, 옹진훼미리호, 통일호, 대건호, 해진호, 미래호 등이다. 희노애락의 사연은 나중에 소개한다.

▶ 해군첩보부대 14용사 충혼비

 

이 비석은 용기포 마을 뒷산 중턱에 있으며, 비석까지 올라가는 층계의 수도 14개의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이며, 관리번호 14-2-06으로 게시판의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이 충혼비는 1950년 3월 25일 이곳 주둔부대에서 해군함정 302호에 승선, 황해도 장연군 월래도(달래섬) 근방에 침투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에게 발각돼 무참하게 사살당한 해군첩보부대원 14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으며, 6·25전쟁 당시 공산분자들에 의해 일부가 파괴돼 없어진 것을 수복 이후 재건했다.

 

14인의 용사 중 비문 상단부에 남아 있는 반공 용사 7인은 다음과 같다. 황기수 평북 회천군, 이종섭 평남 평원군, 김일호 평북 구성군, 강주성 황해도 송화군, 이성겸 황해도 송화군, 이두환 황해도 송화군, 윤상원 황해도 송화군 나머지 7인의 반공 용사는 비석 하단부가 6·25전쟁 중 공산분자에 의해 파괴돼 알 수 없는 상태이며, 파괴된 원형 그대로 현재 보존돼 있다.

 

비석 전면 글씨는 ‘해군 14인 용사 충혼비’로 쓰여 있으나 그 중 ‘해군 14인 용’까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 글씨는 6·25전쟁 중 파괴됐으며, 남아 있는 글씨 또한 공산분자들이 ‘곡괭이’, ‘정’ 등으로 알아볼 수 없도록 글씨를 철저하게 부수어 놓았다.” 호국의 영령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