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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61 - 백령도, 효의 섬 효도(孝島)

심청전에서 심청각까지

 우리나라 사람 중 ‘심청전(沈淸傳)’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대부분은 학창 시절을 통해 적어도 제목은 들어 봤을 것이다.

 

심청전은 작자나 연대 미상의 조선시대 고전소설이다. 내용은 심청이 봉사인 아버지의 개안(開眼)을 위해 공양미 300석의 제물이 돼(인신공희) 인당수에 몸을 던졌지만, 다시 연꽃으로 환생해 아버지를 만나 극적으로 눈을 뜨게 한다는 것으로 지극한 효심을 내포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심청의 고장’이라 주장하는 몇 지역이 있지만 백령도와 전남 곡성이 대표적인 곳. 그렇다면, 백령도는 ‘심청의 고장’임을 어떻게 고증했을까? 1995년 한국교원대 최운식 교수 등이 백령주민, 황해도 피난민 등 63명을 대상으로 지역사회에서 인식하는 ‘심청전설’에 대해 인터뷰를 실시하고, 확인했던 관련 내용을 소개한다.

 

1. 인터뷰한 심청전 내용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에 인당수(또는 임당수)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은 물살이 세서 지나는 배들이 사고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곤 했다고 한다. 그 전에 심청이라는 효녀가 살았는데,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중국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쌀 300석에 몸을 팔았다. 심청을 산 상인들은 심청을 인당수에 제물로 바쳤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은 용궁에 갔다가 연꽃을 타고 다시 인당수로 떠올랐는데, 그 연꽃이 조류를 타고 ‘연화리’ 앞바다로 왔다가 다시 남쪽으로 떠밀려서 ‘연봉바위’에 걸려 떠 있었다.

 

심청을 인당수에 제물로 바친 상인들이 돌아오는 길에 연봉바위 근처에 이르러보니 바다에 커다란 연꽃 한 송이가 떠 있었다. 상인들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그 꽃을 임금께 바쳤다. 연꽃속에서 나온 심청은 임금과 결혼해 왕비가 됐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심청이 탄 연꽃이 떠내려와 걸린 바위를 연봉(蓮峰)바위라 하고, 그 연꽃이 닿았던 마을을 연화리(蓮花里)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까?

 

2. 인터뷰 내용의 팩트 체크

 

◈ 인당수의 물살은 정말 셀까?

 

조선 광해군 때 귀양 왔던 이대기가 그의 책 ‘백령도지’에서 장산곶과 두무진 사이에는 북쪽과 서쪽에서 흐르는 조류가 만나 서로 부딪쳐 소용돌이를 이뤄 물살이 세고 험한 곳이 있다고 했다는 점. 또 남북이 분단되기 전 이곳을 왕래한 사람, 피난 올 때 이 근처를 지났다는 사람들이 물살이 세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 백령도에는 중국 상인이 왕래했을까?

 

백령도는 신라 시대 이래 중국과 왕래하는 항로에 위치, 배를 타고 왕래하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 또는 해난 도피처였다. 또 조세로서 역(役)을 피하려는 중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았고, 중국이나 조선의 해적들은 필요한 물건을 보급하는 보급 기지로 활용했다. 이로 미뤄 백령도나 황해도 장연, 옹진지역에는 중국 상인들이 많이 왕래했을 것이다.

 

◈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에서 뜬 연꽃은 진짜 연봉바위에 걸릴까?

 

연봉은 백령도 남쪽 해안의 남포2리에서 남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바위섬이다. 지름이 약 80m쯤 되는 길쭉한 원 모양의 바위인데 봉우리 두 개가 솟아 있다. 인당수에 떠오른 연꽃은 조수에 밀려와 연봉바위에 걸렸다고 한다. 이것은 장산곶을 거쳐 인당수 쪽으로 흐른 물이 백령도의 두무진을 휘돌아 연봉바위 쪽으로 흐른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 연꽃의 연화리와 연봉바위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까?

 

연봉바위와 연화리는 3~4㎞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연꽃이 연화리로 왔다가 연봉바위로 갔다거나 연봉바위에 걸렸던 연꽃이 연화리로 밀려왔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심청전설’은 백령도 북쪽에 있는 인당수, 남쪽의 연봉바위와 서쪽에 위치한 연화리의 지형과 해류의 흐름, 전부터 전해 오는 민속 등과 일치한다. 이 전설은 오래전부터 백령도를 중심으로 장연, 연백, 송화, 신천, 옹진 등의 황해도 지역과 인근 섬인 대청도 등에서 전해왔다.

3. 심청각 건립에 이르기까지

 

백령도는 심청전의 고증을 토대로 주민의 기저에 있는 효의 미풍양속을 계승, 관광자원화를 위해 1975년부터 지역의 심청 관련 인문학적 유산에 대한 고증을 시작한 이래 20여 년에 걸친 작업과 행정적 준비 기간, 그리고 4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북뫼(北山, 일명 100m고지, 진촌리 산 146-10)에 1999년 10월 20일 심청각(沈淸閣)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건립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따랐다. 1975년 9월 심청전의 배경 무대(인당수, 연봉바위, 연화리)가 백령도임을 확인하고, 1986년 5월 백령중고 백원배 교사 중심의 백령지역 교육문화발전연구회가 발족했다. 이것을 토대로 1989년 심청각 건립을 위한 건의가 정부 차원으로 확대됐고, 고증작업과 심청각 건립을 위한 지역 분위기 조성 노력이 지속됐다.

 

1995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령도가 경기도에서 인천시 소속으로 변경됨에 따라 예산 문제가 재논의되기 시작했고 심청각을 우상으로 여긴 기독교계와의 갈등도 새롭게 발생, 설상가상의 악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민들의 심청각 건립에 대한 의지가 컸기에 건립 찬성 민원이 폭주했고, 마침내 주민설명회를 통해 1995년 12월 공사에 들어가 1999년 10월 20일 준공했다. 일제강점기 신사(神社)가 있던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또 심청각 진입로에 해당하는 백령초등학교와 진촌2리 일대 담장에 심청 관련 일대기를 담은 벽화와 심청의 효심을 주제로 한 지역 초·중·고 학생들의 문예 작품을 게시, 효사상의 계승과 확산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생각도 변했다. 전통 시대의 임금과 신하 간의 수직적 질서를 의미하는 효는 이젠 아니다. 수평적 질서 속에 상호 예절 혹은 생활 예절이 효이자 효의 실천인 것이며, 학생만이 감당할 전유물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녀야 할 변할 수 없는 사회적 규범이자 보편적 가치다.

 

오프라인의 직장과 사회, 온라인의 모임 등 다양한 가운데 예외의 영역은 있을 수 없다. 이젠 백령도는 심청전의 효심을 기저에 두고 효의 섬, 즉 ‘효도 효(孝)’, ‘섬 도(島)’로 구성된 효도(孝島)로서 지역 정체성을 찾고 세월과 물질 만능에 박약해졌던 과거의 효심을 두터이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의 제안이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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