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춘궁동에는 갑분이와 예선이라는 두 아가씨의 우정이 담겼다는 석탑 둘이 하나는 3층 하나는 5층으로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는데, 이 골짜기의 이름이 탑산골 선산동이다. 남한산성에서 금암산 줄기를 따라 이성산성에 거의 다 이른 곳으로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광암터널 부근이다. 그 앞으로는 뚝을 막은 춘궁저수지에 온종일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둘러 앉아 깊은 사색을 낚는다.
옛날 삼국시대에 서로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에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병사가 예쁜 처녀 예선과 결혼하자 갑분이는 식모살이도 좋으니 예선과 헤어져 살 수 없다고 따라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결혼 후 얼마 안 가서 예선은 깊은 병이 들었고, 결국은 숨을 거두게 된다. 예선은 남편에게 자기가 죽으면 갑분이를 맞아 살아달라고 유언을 하고 숨을 거두었으나, 갑분이는 예선과의 우정을 생각하면 어찌 내가 서방님과 살 수 있겠냐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훗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의 우정을 기리느라 쌍둥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하남문화원의 초대 원장을 지내고 하남의 향토역사에 관한 많은 발자취를 남긴 故 이철재 원장은 이 탑을 어루만지며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는 글을 남겼다.
"쾌락이 삶의 극치라고 알고 사는 오늘, 이름만 있으면, 물만 맑으면, 산수가 좋으면, 길이 뚫리기만 하면, 먹고 마시고 자는 집이 들어서고 수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굴리고 대낮부터 찾아와 질펀하게 먹고 뭉개고 다니는 세태에 예선과 갑분의 혼은 저 천국에서 무엇이라 할 것이며, 예선의 낭군은 벼락이라도 만들고 있지 않을까? 낭군은 글을 읽어 출세시키기로 하고 손에 피가 나도록 농사를 짓던 예선 낭자의 모습을 연상하면 지금 이 시기가 바로 그러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릿고개 잊었다고 흥청대며 날뛰는 세태를 보면 밭에서 골라낸 예선 낭자의 돌팔매가 날아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탑 주변에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1970년 여름이었다. 이 탑에서 조금 떨어진 석불상 앞자락에서 밭을 매던 아낙이 금부처를 발견하고 문화재 신고를 하여 보상을 받은 일이 있는데, 어쩌면 그 복은 예선과 갑분낭자가 어여삐 보아 던져준 복들이 아닌가 싶다.
석탑 앞의 솔밭에는 아직도 질서 있게 주춧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화려했던 금당(金堂)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동사(桐寺)’라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현재 5층 석탑은 보물 제12호, 3층 석탑은 보물 제13호, 절터는 사적 제352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인근 학교 학생들의 소풍 명소였었는데, 지금은 관광버스가 멀리 다른 지역으로 실어다 주는 바람에 이 마을 아이들도 잊어가는 역사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동사 주변에는 역사문화의 흔적이 빼곡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이성산성을 비롯해 천왕사터, 하사창동 절터, 자화사 터, 교산동사지 등 많은 사찰유적이 확인되었다.
선산동(善山洞)에는 천일은행(상업은행-우리은행의 전신)과 휘문고등학교의 설립자인 하정 민영휘의 생가터에 기념비가 있었다. 비석에는 ‘河汀閔柱國降生遺墟紀念碑(하정민주국강생유허기념비)’라 새겨져 있었는데 ‘나라의 기둥인 하정(민영휘)이 강생한 유허를 기념한다’는 뜻이다. 강생(降生)은 일반적인 출생이 아니라 신성하고 거룩한 탄생을 의미하는 것인데, 민영휘의 일생은 적극적인 친일 행위로 일관하였다. 몇 년 전 생가터에는 건물이 생기고 비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