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 경기대 한반도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파리정치대학 정치학박사](https://www.kgnews.co.kr/data/photos/20221041/art_16656245620504_bb8be8.jpg)
‘세상의 근원.’ 여성의 하체를 노골적으로 그린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걸작이다. 너무도 사실적인 이 그림은 오랜동안 초록색 실크 베일 뒤에 숨어 있었다. 세간을 놀라게 한 스캔들의 화가 쿠르베. 그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중 가장 파워풀했다.
프랑슈 콩테 오르낭(Ornans)의 지주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 딸 부잣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유년기 아버지의 농장에서 소를 치고 농사를 직접 지었다. 동네에 나가 산사람들과 사냥꾼, 어부,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오르낭의 쿠르베 집](https://www.kgnews.co.kr/data/photos/20221041/art_1665624699513_de391a.jpg)
그가 미술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이 생활은 브장송 왕립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학도가 되길 원했다. 뜻을 거역하지 못한 그는 공과대학 입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낙방했다. 진로를 바꿔 스무 살이 되던 해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상경했다. 그러나 법 공부대신 매일 그림만 그렸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던가! 결국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허락했고, 발 벗고 나서서 지원해 줬다.
너무도 자유분방했던 이 화가는 학교 대신 루브르 박물관을 좋아했다. 매일 거기에 나가 거장들의 그림을 복사해 연습했다. 쿠르베는 스무 살 때부터 파리의 도회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의 원천은 오르낭이었다. 서른 살 때 살롱전을 연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틀리에를 열었다. 화풍은 180도 변했다. 낭만 풍을 벗어던지고 지극히 사실적이었다. ‘오르낭에서 저녁 식사 후’는 이를 잘 나타내 준다. 이 그림은 금상을 탔고 프랑스 정부는 1500프랑에 샀다. 그 후 1년 뒤, 쿠르베는 고향 사람들과 관계를 재개하며 ‘오르낭의 매장’을 그렸다. 이 그림 역시 스캔들을 일으켰다. 대형 화폭에 무명의 농부와 추할대로 추한 조문객들을 빼곡히 그렸기 때문이다. 큰 화폭은 대개 국왕이나 영웅의 장례식 그림에 사용돼 고결함과 사기를 드높인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달랐다. 당시의 정치적 동요를 풍자한 것이라는 의혹을 살만 했다. 그러나 쿠르베는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오르낭과 나엥 다리'.: 프랑슈콩테의 작은 베니스라 불린다.](https://www.kgnews.co.kr/data/photos/20221041/art_16656246992852_8c7f58.jpg)
쿠르베를 일등석에 올린 오르낭.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감는 두(Doubs)의 작은 마을이다. 리종과 루(Lou)의 샘들과 폭포, 바위가 두드러져 보이는 계곡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을에는 사냥감이 많은 방목림과 수렵장으로, 겨울에는 눈 덮인 대지로 변신한다. 이 대조적인 경치들은 쿠르베의 그림재료가 됐다.
오르낭은 자연경치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이곳은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다. 중세에 건축된 오르낭 성이 있고, 옛날 농부들의 연장을 만들던 타이앙드리 공장이 남아있다. 여기에 16세기 건축된 에베르호텔은 여전히 고색창연하다. 이 호텔에서 꾸르베가 태났고 지금은 쿠르베 미술관이 됐다. 꾸르베와 오르낭! 이 둘이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다. 이들을 보기 위해 오르낭 현장으로 그 언젠가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