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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예술기행] 슈바이처와 귄스바흐

 

 

분수가 흐르고 계단 위에 한 사람이 정갈히 손을 포개고 앉아 있다. 우리의 소녀상을 흡사 닮았다. 단지 이 주인공은 콧수염을 가진 사나이다. 슈바이처 박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주가 그를 기리기 위해 생 토마 광장에 만든 청동상이다.

 

알베르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행동하는 인간이자 인도적 지원의 파이오니아였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다 끝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생명에 대한 외경(Respect de la vie)’을 중시했고 이 윤리를 잊으면 인류문화는 안녕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이를 높이 평가한 스톡홀름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거룩한 휴머니스트는 1875년 1월 프랑스 동부 카이제르베르(Kaysersberg)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6개월 된 그를 안고 발령지인 뮌스테르의 귄스바흐(Gunsbach)로 갔다. 거기서 세 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선물을 슈바이처는 자연스런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스러워했다.

 

조숙하고 사려 깊었던 꼬맹이 슈바이처.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그의 감성은 남과 다른 특별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자연은 그의 우주였고 이는 그의 전 인생을 지배했다. 그의 소심함과 단호함은 어머니를 닮았고 활기 넘침은 아버지를 닮았다.

 

 

 

슈바이처의 꿈은 음악가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의사를 꿈꾸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피아노와 오르간을 가르쳤다. 어느 날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사고로 부재하자 그가 대타로 연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슈바이처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그가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을 정식으로 교육받은 건 열네 살 때. 외젠 뮌흐(Eugène Munch)의 사사를 받으면서부터다. 2년 후 그는 스승을 대신해 종교행사의 연주자가 됐고 열일곱 살 때는 첫 콘서트를 열어 브람스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슈바이처가 음악을 사랑하고 낙천적 비전을 갖는데 큰 영향을 미친 건 그의 삼촌 루이와 숙모 소피, 스승 뮌흐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의심의 여지없이 음악, 신학, 철학을 함께 병행하기로 결심했다.

 

알자스 지방인 귄스바흐와 밀루즈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이러한 꿈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러던 중 잠시 집을 떠나 외지인 파리에 갔다. 거기서 그는 진정한 음악세계를 발견했다. 스트라스부르로 다시 돌아와 그는 목가적인 음악을 공부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알자스-로렌은 리히치 독일로 합병됐다. 슈바이처는 프랑스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 고전 책들을 소장한 방대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슈바이처는 열심히 책을 읽고 독일과 프랑스 양쪽 문화를 모두 익혔다. 그 덕분에 그는 스물네 살 때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가 됐고, 곧이어 신학박사까지 됐다. 생 니콜라(St Nicolas)를 설파하는 신학자로 활동하면서 오르가니스트이자 바흐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고 가르치는 매우 존경받는 음악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거의 완벽한 삶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문했다.

 

서른 살에 인생의 반전을 맞은 슈바이처

 

분명 그는 다른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바치고자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었다. 어느 날 집에 도착한 그는 탁자위에서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아프리카 가봉에 의사로 갈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눈이 뻔쩍 뜨였다. 인생의 미션을 바야흐로 찾게 된 것이다.

 

서른 살인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인턴과정을 마치고 열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와 베를린에서 몇 개월간 머물렀다. 이때 가봉에 병원을 만들기 위해 5000달러를 모금했다. 이 돈은 아프리카에서 2년간 병원활동을 하기에 충분했다. 함께 떠나기 위해 엘렌느 브레슬로(Hélène Bresslau)와 결혼도 했다.

 

1913년 성금요일, 서른여덟 살의 슈바이처는 귄스바흐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보르도로 떠나 가봉행 배를 탔다. 오고우에(Ogooué) 강을 타고 마침내 랑바레네(Lambaréné)에 도착한 그는 부랴부랴 병원을 짓고 수많은 나병환자를 치료했다. 생명에 대한 외경을 손수 실천하였고 결국 그곳에서 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슈바이처가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자 그의 유년의 고향 귄스바흐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프랑스 알자스 오랭(Haut-Rhin: 라인강 위쪽) 지역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은 1278년 탄생했다. ‘귄스바흐’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늪지의 개울 혹은 귀노(Guno)라는 사람의 개울이라는 설이 있다. 13세기 프픽스부르(Pflixbourg) 성이 있는 왕국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9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뮌스테르 계곡에 펼쳐져 조용하고 평화롭고 녹색의 자연 경치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콜마르(colmar) 마을 역시 너무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즐겨 온다. 슈바이처가 태어난 카이제르베르 역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의 문화예술 고장으로 2017년 프랑스 최고의 도시로 선정됐다. 슈바이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뮌스테르와 귄스바흐를 방문하고 이곳 일대를 돌아보면 환상의 여행코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귄스바흐. 슈바이처 마을답게 그를 추억케 하는 것이 수없이 많다. 슈바이처 메종과 기념관, 슈바이처 오솔길, 아프리카 박물관, 물의 산책 등등. 슈바이처가 유년에 살았던 집은 지금 대중에게 오픈되고 있고, 그 옆에 슈바이처의 부모님과 그의 동생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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