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끝내 창씨개명 되는건가.
왜놈들이 조만간 이곳에 대나무를 심을건가.
그리하여 마침내, 다께시마, 竹島로 소유권 이전을 완료할건가.
세찬 바닷바람 몰아치는 대숲 한가운데서 욱일기 당당하게 펄럭일건가."
'2023년 대통령 3.1절 기념사 쇼크' 이후, 나는 홀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제에 독도 관련 서책들을 여러 권 읽어보았다. 그 중 조선 숙종 때 인물 안용복 장군(1658~ ?)과 6.25 참전 상이용사 33인이 결성한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1929~1986)의 삶에 특별히 마음이 쏠렸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여당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이 위대한 인물들의 대칭이기 때문이다. 야당의 정치모리배들도 별 차이 없고.
역사적으로 '우산국(于山國)'이었던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이 복속한 때(512년)부터 우리 영토로 되어 있다. 우산국은 신라가 강성해지는 과정에서 먹힌 군소 왕조의 저항세력들이 도주하여 건너가서 세운 나라였다. 대마도와도 가깝기 때문에 오랫 동안 왜인들도 다수 거주하거나 왕래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울릉도와 독도를 중시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관심 밖이었고, 왕래는 죽음의 리스크를 져야만 했다. 세종조차 울릉도를 무인도로 만들어버리는 공도(空島)정책을 썼다.
대한제국 때(1883년) 고종이 마침내 500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일본정부에 항의하여, 일본인들의 울릉도 체류와 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잘한 일이다. 친일파였다고 비판받는 김옥균이 고종의 특명을 받아 이를 주도했다. 울릉도 이주 희망자를 모집하여 실행에 옮긴 것은, 소위 '실효적 지배'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독도는 우리땅'의 대못을 친 쾌거의 국정사례였다.
독도가 위태롭다. 17세기에 안용복은 목숨 걸고 도쿠가와 막부와 담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홍순칠의 독도수비대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일본의 강점야욕을 분쇄하고 독도를 지켜냈다. 조선왕조는 안용복을 고문치사에 이르게 했다. 한국정부는 홍순칠 의병대에 배은망덕으로 일관한다. 울릉도 갑부 홍순칠 가문은 가난뱅이가 되었다. 별로 놀랍지 않다. 이 나라에는 안용복과 홍순칠들이 부지기수다. 권력은 언제나 그들을 홀대하거나 적대시한다.
당시에 일본은 사사건건 독도를 불법점령했다며 홍순칠을 비난했다. 미군도 살신성인하는 홍순칠을 사상적으로 의심하여 강제 연행했다. 한국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독도로 돌아온 홍순칠은 "독도에 상륙하는 자는 국적과 피아(彼我)를 불문하고 총살한다"고 바위에 새겼다.
그후 5.16 세력의 핵심인사들은 '한일국교 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독도를 공군사격장으로 지정하여 없애버리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의 입장은 불변이다.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기자는 것이다. 그 저의가 무엇이겠나. 돈과 각종 이권 주고받기로 승소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독도는 동도가 88미터, 서도가 168미터의 작은 봉우리지만, 해수면 아래로는 2천미터가 넘는 큰 산이다. 해양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독도주변은 해양생태의 보고이며, 광물자원의 값어치는 수치로 환산하기 어렵다고 한다. 독도로부터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원칙을 기준으로 우리 해양영토는 육지의 두배나 된다. 일본이 언어도단의 어거지를 쓰는 유일한 이유다. 독도는 풍전등화다.
김탁환의 '독도평전'은 울릉도 독도와 관련한 거의 모든 문헌과 저작들의 결정판이다. 진지하고도 흥미진진하다.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