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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소] 일제에 항거한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인천 동구 ‘조선인촌주식회사’

1917년 배다리 마을에 일본인 사업가 성냥공장 세워…대량생산 가능
여공 800여명 근무…살인적 노동환경에 임금 착취까지
1921년부터 4번 파업…노동권 쟁취 투쟁이자 일제강점기 민족 저항운동

 

15. 일제에 항거한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인천 동구 ‘조선인촌주식회사’

 

100여 년 전, 인천 동구 배다리 마을은 노동운동과 민족 저항운동을 벌이며 일제에 당당히 항거한 어린 조선인 여공들의 피‧땀‧눈물로 가득했다.

 

1917년 10월 4일 인천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을 아우르는 배다리 마을에 ‘조선인촌주식회사’라는 성냥공장이 문을 열었다.

 

설립자는 카레이 에이타로라는 일본인으로, ‘조선인촌’이라는 이름에서 ‘인’은 ‘人(사람 인)’이 아닌 ‘燐(도깨비불 인)’을 의미한다.

 

에이타로는 배다리 마을이 경인철도를 중심으로 산업시설과 상권이 형성됐고, 압록강 일대 삼림지에서 나오는 목재를 배로 쉽게 들여올 수 있어 성냥공장 부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 공장은 근대적 생산설비를 갖춰 성냥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1930년대에는 전국 생산량 70% 이상을 차지했고, 신의주와 평양까지 지점을 내며 국내 대표 성냥공장으로 성장했다.

 

 

설립 초기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은 450여 명이었지만 1930년대에는 800여 명까지 늘었고, 부업 종사자는 2800여 명에 달했다. 생산 규모도 연간 7만 상자까지 커졌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대부분 10대였는데,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1만 개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담아야 했다.

 

여공들은 살인적인 노동에 임금 착취까지 당했음에도 배움의 열망을 품고 야학당인 계명학원에서 공부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열악한 노동환경에 일본인 감독관의 괴롭힘까지 이어지자 1921년 3월 11일 첫 파업을 선언했다.

 

이 파업은 인천 최초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으로, 인천항 정미공장 여공 파업과 함께 192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첫 파업은 주동자 1명이 구속되고 3명이 경찰에 검거되며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926년‧1931년‧1932년까지 여공들은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3번이나 더 파업을 선언했다.

 

당시 여공들의 파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넘어 노동권 쟁취를 위한 투쟁이었다. 일제강점기 만연했던 조선인 착취에 경종을 울리는 민족 저항운동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공장은 폐업했는데, 한국전쟁 이후 이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새로운 성냥공장을 세웠다.

 

전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 성냥은 생활수단을 넘어 집들이 선물과 제품‧영화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성냥의 인기는 라이터의 등장으로 시들해졌고, 조선인촌주식회사는 1960년대 성냥의 쇠퇴와 함께 사라졌다.

 

현재 터만 남아있는 이곳에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다만 터 옆으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문을 열어 배다리마을 성냥공장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 경기신문 / 인천 = 박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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