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이 바삐 출근길 차에 오를 때 나는 말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딸에게 새 아침 희망적이고 활기찬 언어적 에너지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재로 돌아와 벽면 해돋이 사진을 본다.
2000년 새 아침은 지리산에서 맞이했다. 아침이라서 새로운 영혼으로 천 년의 새 아침 빛을 가슴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아침 기도를 하고 촬영하기 좋은 산봉우리 바위 곁에서 니콘 카메라를 목에 걸고 서서 해 뜨는 순간을 기다렸다. 운해 속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카메라 앵글 속으로 찰칵찰칵! 끌어들였다. 셔터 동작소리가 아침 산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아래 검은 부분은 산이요. 중심과 위로는 붉은빛이다. 산 능선의 중간 조금 낮은 중심에는 계란 노른자 빛 태양이 똥그랗게 떠 있다. 해는 멀리서 길을 내고 온 듯 연한 빛이 강물의 곡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을 챙겨보고 새로운 구실과 각오를 다짐하는 순간, 맑아 눈부신 세상에 서 있으면 내 가슴도 맑아져 하얘지는 것 같았다. 순백이 주는 순수한 영혼의 피가 도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새아침 환한 흰 빛으로서의 고요, 맑음, 그 깊이, 무게! 그 시간을 만나고자 설산을 걸어 오른 것이다.
정조의 치세 어록을 보면, 1797년 12월 말, 광주목사 서형수에게 보낸 비밀 편지 내용과 함께 “해가 바뀌는 시기가 되면 무엇보다 앞서 초가에 누더기를 입은 백성이 떠오른다. 연말에도 이지경이니 년 초에는 더 심각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도적떼가 날뛰는 것도 괴로운데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아전들이 앞장서 도적떼와 결탁해 한 술 더 뜬다. …‘ 백성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조의 마음이 까닭 없이 고맙고 눈물겹다. 우리는 언제 제2의 정조 같은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김삿갓의 지혜』라는 책을 읽다 보면, 「세 사내의 추위 자랑」이 있다. 장터를 지나가던 김삿갓이 사람들이 빙 둘러 모여 있어 다가갔다. 그곳에서는 누구의 고향이 제일 추운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함경도 출신 박 서방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고향에서는 겨울이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소, 왜냐면 너무 추워서 말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꽁꽁 얼어붙기 때문이요. 그러자 군중 속에서 누가 물었다. 그럼 겨울 동안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산다는 말이오? 아쉽지만 겨울 동안에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봄이 되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말들이 공중에서 전부 녹아 쏟아져 나와 왁자지껄 시끄러워진다오. 김삿갓은 그의 말을 듣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인생은 산 날들의 집합이다. 하루하루 산 날들이 모였을 뿐이다. 하루하루 잘 살아야 한다는 이유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나 자신의 길에서 나답게 살아지고 결실이 되어야 한다는데 새 아침의 마음가짐은 달라야 한다. 언 땅을 밟고 온 세월을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뿌리를 깊이 내리며 슬퍼할지언정 그 어떤 그리움에 시달리지 않기를 소망하며 삶에 대한 이해와 긍정을 넓혀가고 싶다. 어쨌든 삶은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자연과 사회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