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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칼럼] 지금도 지배하는 이승만의 저주

 

 

우리나라는 헌법보다 국회가 먼저 만들어졌다. 1947년 11월 14일 UN 총회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했다. UN한국임시위원단의 관리하에 1948년 3월 31까지 총선거가 계획됐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UN은 다시 1948년 2월 26일 ‘한국 가능지역 총선거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한국 가능지역’은 남한을 뜻했다. 이렇게 총선거는 남한만을 대상으로 치러졌다. 우리나라의 제헌의회는 이렇게 구성됐다.

 

제헌의회의 당면한 숙제는 헌법의 제정이었다. 헌법이 없다는 것은 정해진 정부형태도 없다는 것을 뜻했다. 제헌의회의 정부형태에 대한 초기 논의는 내각제가 유력했다. 하지만 연장자 순으로 국회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고집했다. 정부형태를 내각제로 선택하였을 때 국내 지지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 세력이 다수당을 점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통해 권력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제정의회의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기초위원회)는 내각제를 추진했지만 막판 이승만의 고집으로 결국엔 대통령제가 채택되었다. 그 결과 대통령제임에도 내각제 요소가 결합 된 다소 독특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내각제의 특징인 국무위원이 대통령제를 채택한 한국의 정부형태에 도입되었다. 내각제를 염두에 두고 정부형태를 준비하던 중 서둘러 대통령제를 채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제가 시작된 미국의 그것과 상당히 다른 형태의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시작부터 의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대통령제는 삼권분립에 충실한 제도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이고 입법은 철저히 국회의 몫이다. 하지만 이승만의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기 초부터 사사건건 국회와 갈등을 빚었다. 반민특위는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승만은 조금 과장하면 철저히 국회를 무시했다. 그만큼 국회와의 갈등은 커졌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장면내각이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내각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인 박정희는 다시 대통령제를 원했다. 그렇게 내각제의 경험은 짧게 지나가고 이승만 보다 더욱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가 도입됐다. 박정희는 아예 국회를 없애버리려까지 했다.

 

대통령제의 핵심은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의 상호 견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집권여당과 야당의 대결이 형성된다. 행정부와 집권여당이 한 편으로 움직이니 의회의 행정부 견제는 요원하다. 당연히 대통령의 국회 존중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4월 총선에서 국민은 야당에 압도적인 의석을 몰아주었다. 전문가들은 국민이 정부여당에 대한 견제를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엄밀히 ‘정부여당에 대한 견제’는 대통령제와는 모순된 표현이다.

 

여하튼 국민이 정부여당에 대한 견제를 선택하였다고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채 해병 특별법, 김건희 여사 특별법 등 일련의 입법행위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간다면 윤대통령 임기 중 거부권 행사가 10회를 넘어 20회에 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의회에 대한 무시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변태적인 대통령제의 유산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잡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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