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는 캐치프레이즈의 출산제한정책이 시행될 정도로 높은 출산율 기록했던 대한민국이 60년 만에 ‘하나라도 낳아 잘 기를 수 있기’를 바라는 시대를 맞닥뜨렸다.
시간이 흘러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공존하게 됐고,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임신·출산 선택이 중요해졌다. 정치권에서는 걱정 없이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도록 일과 양육, 개인 삶의 균형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저출생 법안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부부’ 또는 ‘사실혼’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임신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은 방치되고 있는데 아이를 낳고자 하는 여성들의 ‘진통(陣痛)’을 가로막는 원인과 해결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사상 초유의 ‘인구 국가비상사태’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6월 19일 사상 초유의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공식 선언했다.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2명까지 내려가는 상황에 본격적으로 국가가 나서 관련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정부는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이하 저출생 대책)’을 발표했는데 저출생의 직접적 원인인 일과 가정양립, 양육, 주거 등 3대 핵심분야·151개 대책을 인구전략기획부를 통해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국가 차원의 저출생 대응은 처음이 아니다. 다만 2005년 ‘저출산·고령화사회기본법’ 제정 이후 지난해까지 모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만 약 280조 원을 관련 예산에 투입했음에도, 끝내 합계출산율은 1명 미만(2018년 기점)으로 돌아섰다.
때문에 현재 정부의 저출생 대응에 더욱 섬세한 접근이 요구되면서 혼인 중심의 임신·출산 등의 제도적 논의를 ‘비혼(非婚)’ 영역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선진국 출산율 증가의 핵심, ‘유연한 혼인제도’
통계청 인구동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혼인 외 출생아 수는 총 9763명으로, 같은 해 전체 출생아의 3.9%를 차지했다. 2018년 2.2%부터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인 결과다.
OECD 국가 평균 혼인 외 출생아 비율(2020년)은 41.9%이다. 가장 높은 국가는 칠레(75.1%), 아이슬란드(69.4%), 프랑스(62.2%) 순으로, 한국과는 큰 격차를 보였다.
혼인 외 출생아 비율이 높은 국가에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높은 출산율과 여성의 높은 경활률 ▲등록동반자제도·동성혼 합법화 등 유연한 혼인제도 ▲낮은 성격차지수를 가진 성평등 국가 등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팍스(PACS, 시민동반자) 등록 제도’를 통해 법률혼 외의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세금혜택과 출산·가족 관련 휴가 등의 사회보장제도를 기혼자들과 동등하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복잡하고 고비용을 들이는 이혼과 달리 결별이 매우 간단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 전체 혼인 건수와 팍스 등록 건수의 격차는 제도가 도입된 1999년 28만 7393건에서 2022년 3만 4173건(INSEE, 프랑스 통계청)으로 대폭 좁혀졌다.
아이슬란드의 경우 첫째아의 83%가 비혼 출산이다. 아이슬란드 여성의 80%가 혼인 전 ‘동거등록제’를 활용하고 있으며 육아휴직 소득대체율(상한선 약 600만 원)이 높은 점 등이 출산율에 기여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혼인 외 출산과 혼전 동거가 규범으로 되어있어 자녀출산과 양육에 혼인 여부·관계의 유형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전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은 “(혼인 외 출상아 비율이 높은 국가들은) 혼인이 자녀를 출산하는 규범적 여건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고, 비혼 동거 및 다양한 가족 구성에 관한 진보적 법률이 마련돼 있다”고 해석했다.
◇결혼하지 않아도 임신·출산 ‘OK’
여성의 교육수준 향상과 노동시장 참여가 확대되며 비혼 남녀 모두 ‘노동중심 생애주기’를 중요시하게 됐는데, 이에 따라 혼인 전제 임신·출산의 한계가 드러났다.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2024 자녀·육아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53%는 결혼하지 않아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2022년 이후 매년 오차범위 이내 수준에서 증가한 수치(48%→51%→53%)로써 한국사회에서의 ‘결혼=자녀양육’이라는 관념이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반 여성의 경우 생물학적 가임력이 35세를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한다. 특히 개인화된 ‘노동중심’ 생애과정에서 혼인이 늦어지며 원치 않는 난임 등을 겪을 확률은 더 높아지고 있고, 임신이나 출산 실패 확률이 높거나 성공이 불확실한 경우 혼인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경기도 수원에 거주하는 30대 여성 강주미 씨(익명)는 몇 년 전 난임 판정을 받은 뒤 난임 치료를 위해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법률혼이나 사실혼이 아니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강 씨는 “난임 전문 병원을 수없이 두드려봤지만 결국 배우자가 없다는 이유로 시술이 제한됐다”며 “일부 병원에서는 결혼을 안 했으면 사실혼처럼 서류를 가져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법률혼·사실혼 관계의 부부여야만 난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난임 시술은 원칙적으로 ‘부부’관계에서 시행한다”는 윤리지침을 만들어 비혼 여성의 배아 생성을 제한하고 있다.
김진희 법무법인 메리트 변호사는 이에 대해 “비혼 여성의 출산은 헌법적 행복추구권과 수반되는 자기결정권의 관점에서 법적으로 제한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인공임신 시술방식은 상당한 경제적 비용이 요구되고 있는데, 난임 부부에게 지원하는 제한적 혜택조차 (동등하게) 지원되지 않는 한 비혼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간절히 원하는 경우에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비혼 출산’ 제도적 기반 다져야
이에 전문가들은 저출생 대응의 일환으로 여성의 재생산권(자신의 몸과 출산 등 생식에 대한 모든 권리를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는 권리) 관점에서 국가차원의 ‘비혼 여성’ 출산·양육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재강(민주·의정부을) 의원은 난임 지원사업은 유지하되 ‘비혼 임신시술’에 대한 정의 및 지원, 기준 등의 조항을 별도 신설한 모자보건법 개정안 대표발의를 앞두고 있다.
그는 법안 발의에 앞서 비혼 여성 권리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국회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나인선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모자보건법으로 비혼 여성의 시험관시술 지원이 가능해지더라도 의료인 단계에서 자의적으로 거절할 경우 이를 방지할 법은 없다”고 꼬집었다.
나 변호사는 “생명윤리법상 절차 규정의 개정을 통해 비혼 여성이 의료인 단계에서 막히지 않고 시험관시술을 요청하고, 기관위원회 심의 과정 및 논의 내용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불승인 시 사유 및 불복 방법을 고지받고, 불복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 개정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 경기신문 = 김한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