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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당태종 이세민

 

1300년 전, 그는 당나라의 2대 황제(598-649)였다. 후대로부터 중국 5천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통치기간은 627년부터 649년까지. 24년간이었다. 당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당시 세계최강의 제국이었다. 

 

그의 치세(治世)를 역사가들은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칭송했다. ‘세상을 올바르게 본다’는 뜻의 ‘정관’(貞觀)은 태종의 연호다.

 

그는 공자를 존경하고 따르면서도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무위지치(無爲之治)가 최고의 정치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했다. 도교(道敎)를 국교로 삼은 것이 그 증거다. 불교를 공부한 후에 역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체없이 유불도 삼교정립(儒佛道 三敎鼎立)을 국가의 사상적 정체성으로 정립(定立)시켰다. 

 

“철학자가 군주가 되거나, 군주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에 합당한 인물이다. 그의 위대한 리더십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노장공맹(老壯孔孟), 그 2천년 스승들의 핵심사상이 체화된 품격정치의 바이블이다.

 

 

아래의 인용문들은 ‘정관정요’에 나와 있는 태종의 사람됨과 그의 정치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켰다. 그들과 언제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듣기에 불편할만큼 혹독한 충고도 허용했으며,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즉시 자신의 문제점을 바로잡았다.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을 아꼈으며, 형법을 신중하게 사용하였다. 문화를 중히 여겼다. 백성들이 전쟁이나 토목사업에 동원되어 농사철을 놓치지 않도록 했다. 군주와 신하가 항상 서로 거울이 되어 선행을 하려고 애썼다. 근면검소했다.” 

 

“관리들은 대부분 스스로 청렴하게 생활하고 근신했다. 왕자들과 왕후나 왕비들, 공주들의 시댁들, 권문세가, 간사한 무리들을 통제했다. 이들은 모두 국법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행실을 삼갔다. 감히 일반백성들을 침범하거나 억누르지 못했다. 상인이나 여행객이 벽지에서 투숙하더라도 강도를 만나지 않았고, 좋은 정치 덕분에 감옥이 텅텅 비었다. 외출하는 사람들은 몇 개월씩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나그네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없더라도 모두 오고가는 길에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다스림은 모두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다.” 순수한 청년 정치지망생이 꿈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재했던 역사다.

 

어느 날, 태종과 동양사 최고의 신하로 역사에 남은 위징(魏徵. 580-643)과의 대화다. 


“군주된 자가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면, 마치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소. 몸이 곧으면 그림자도 곧은 법이오. 윗사람이 훌륭하게 다스리려고 노력하는데, 아랫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경우는 없소. 무슨 일에서든 탐욕이 재앙을 부른다고 생각하오. 만일 군주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면, 백성들은 그 때문에 사분오열할 것이고, 변심하여 원한을 품고, 모반하는 이가 생겨날 것이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고, 감히 나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소.”

 

“옛날 성스럽고 현명한 군주들은 모두 가깝게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 행동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 안의 온갖 사물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고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군주의 품행이 단정한데,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위징은 '실제로 목이 달아나더라도 할 말은 하라'는 뜻이 담긴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직책이었다. 위의 응답도 죽음을 각오한 신하의 간언(諫言)이다. 태종처럼 위대한 지도자도 위징의 충간(忠諫)을 듣고 칼을 뺐다가 도로 집어넣은 것이 300회가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끝까지 경청한 날은 언제나 마음 편하게 단잠을 잘 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 정치는 혁명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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