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에는 봄이 온다. 봄풀이 돋아난다. 이맘때쯤 농부는 한해 작부 계획을 세운다. 이 밭에는 뭘 심고, 이 밭에는 뭐와 뭐를 같이 심고. 밭에서 자라는 풀들은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서로를 이겨내려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풀의 다양한 성질을 잘 알면 아는 만큼 밭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의 농부는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아는 수준이다.
흔히 ‘잡초’라 불리는 풀도 그 성질을 알면 ‘작물’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잡초’가 ‘작물’이 되기도 한다. 같은 풀도 내가 모르고 안 기르면 ‘잡초’고, 내가 알고 기르면 ‘작물’이 되니, 순전히 인간 중심적 작명이다. 그 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약이 되어줄 풀의 입장에서 보면 ‘잡초’라고 눙 쳐버리는 인간이 가엽고 멍청하게 보일 것도 같다.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지 않고 ‘너희들은 잡것이야’라고 건방 떠는 인간이 방자하게 보일 것도 같다. 이런 생각을 하기에 나는 이름 모르는 풀을 ‘잡초’라 하지 않고, ‘들풀’이라 부른다. 마치 학생 이름을 외우지 못한 교사가 그 학생을 ‘어이, 잡놈’이라 부르지 않고, ‘거기, 학생’이라 부르는 미안함, 조심스러움을 담은 표현이다.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그 존재를 모르는 나의 부끄러움과 그 존재를 알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헌법이라는 밭 위에서 같이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마치 ‘잡초’라 부르듯 ‘빨갱이’라, ‘수구꼴통’이라 부르지는 않는가. 마을의 어르신이 어떤 때는 정 많은 어르신이 됐다가도 어떤 때는 수구꼴통이 된다. 마을의 고마운 일꾼이 어떤 때는 빨갱이로 불리기도 한다. 생활공동체에서는 정을 나누는 관계가 스마트폰 속에서는 적대적 관계가 된다. 영어 ‘스마트(smart)’란 단어에 ‘영리한’이라는 뜻 외에 ‘쑤시는 듯한 고통’, ‘감정을 해치다’, ‘뻔뻔스러운’과 같은 뜻도 있음이 기괴한 우연만은 아니리라. 스마트폰은 내게 쑤시는 듯한 고통을 주는, 나의 감정을 해치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접하게 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농부가 밭에 나는 풀을 내 소중한 ‘작물’에 해를 끼치는 ‘잡초’가 아니라, 내 ‘작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들풀’로 여기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나를 화나게 하는 스마트폰 속 국민을 제거할 ‘잡초’가 아니라 함께 할 ‘들풀’로 여긴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까? 무지한 농부가 ‘잡초’를 잡겠다고 무작정 제초제를 뿌리면 그 밭은 죽게 된다. 무도한 대통령 윤석열이 ‘반국가세력’을 잡겠다고 무작정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헌법은 죽게 된다.
작년 12월 3일부터 헌법이라는 밭은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흔히 그런 밭을 쑥대밭이라 한다. 알다시피 쑥은 대표적 ‘잡초’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물과 떡 등 음식 재료가 되고, 약도 된다. 일단 이 밭을 살려야 한다. 그래야 그 밭 위의 ‘들풀’ 같은, 헌법 위의 다양한 국민이 제빛을 내며 함께 살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은 그 밭을 살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