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역 앞 역전시장 내부는 옷가게부터 장판가게, 표구사, 꽃집 등 작은 상점들이 부산스럽긴해도 나름의 질서속에서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상점과 상점을 잇는 좁은 통행로는 마치 숲속 작은 오솔길처럼 이어져 아기자기하면서도 과거 어딘가에 시간이 멈춘 듯 정겨움이 묻어난다.
세련되진 않지만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그곳에 최근 낯선 카페가 들어와 화재다. 커피를 팔지만 돈 대신 작품을 받는 ‘시장커피(Bazaar Coffee)’가 바로 그곳이다.
이 카페에서 커피값 대신 받는 작품은 그리 대단할 게 없다. 카페 맞은편 옷가게 사장님과 시장 건물 앞에서 바나나를 파는 아주머니, 그리고 오고가다 들린 손님들이 커피 한잔 마시며 끄적인 그림이나 글귀 정도가 전부다.

이곳에 카페를 창업한 주인장 천근성 작가는 "이 모든 작업이 너무 즐거운 미술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이후 설치 미술 작가로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5년 전부터는 미술관 문턱을 낮추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미술작품이 반드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만 전시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는 요양병원이나 서울역 같은 곳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열곤 했다.
이런 작가의 남다른 시선에 수원미술관이 개관10주년을 맞아 그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과제는 어떻게 하면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 수 있을까.
수원미술관의 의뢰를 받고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그는 '예술가의 작업실'을 생각했다. 예술가의 작업실을 오픈해 사람들에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웃과 소통하며 미술이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할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공간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파는 과정에서 이곳에는 손님에게 커피를 권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가는 문화가 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카페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천작가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항상 자신의 주변에서 찾는다. 치밀하게 계획하기보다는 브리콜라주(Bricolage)처럼 현장에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찾는다. 스스로 설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만들어 갈지를 계속 관찰해 나가는 방식이다.
시각예술가인 그에게 예술은 어떤 사물을 유심히 보게 하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어떤 마음이 깃들어 있고 혹은 어떤 것은 보기 싫은데 봐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걸 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죠"라며 "우리는 본다고 하지만 실상 안 보는 경우가 많아요. 수원역 앞이라든가, 서울역 앞이라든가 보려고 하지 않는 것들이 되게 많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게 만드는게 예술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는 시장에 카페를 차렸다. 그가 역전 시장에서 본 것은 다름 아닌 선물이었다.
“시장은 원래 물물교환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어릴 적 시장 상인이셨던 엄마의 손을 잡고 다녔던 그곳은 환대가 넘치고, 덤이 있고, 상인 간 경조사도 챙기는 등 고마움과 따뜻함이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시장이 주는 선물이예요. 저는 그것이 선물 경제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이 시장 안 뿐 아니라 세상 안에도 많이 퍼져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상 천작가는 이곳의 일원으로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한다. 가장 먼저 그가 하는 일은 인사다. 그는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카페 앞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상가 앞쪽 신발 가게 사장님은 처음엔 인사를 해도 안 받으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인사를 하니까 인사를 받으시고 그 담엔 왜 이런 카페를 하느냐고 물으시더니 급기야 오늘 비로소 한달만에 카페에 들어오셔서 (커피를)드시고 가셨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어느덧 카페 운영도 이달 27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천작가는 이 시간들이 자신에게 뾰루지 하나 혹은 각질 하나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두 달이란 한정된 기간동안 운영되는 카페지만 이 기간동안 뭔가 최대한 해보자는 생각으로 카페를 시작했다"며 처음 다짐을 떠올린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예술가들 일색이다보니 늘 대화가 비슷비슷했어요. 늘 어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같았는데 이곳 카페 사장이 돼 다른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너무 좋았다”며 “이들과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사람의 또 다른 면이 보여 고정관념에 갖힌 내 스스로가 깨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시장카페'는 어느덧 이곳의 명물로 자리잡아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이 오며가며 들러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이 됐다.
천작가는 “주변에 카페가 여기밖에 없어요. 이제 커피하면 바로 다 여기로 통하고, ‘작가님’이라고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한 명의 작가를 정말 친근하게 알게 됨으로써 이제 미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미술과 잘 아는 사이라는 친밀감을 형성하게 됐어요"라며 나름의 성과를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천작가의 '시장카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미술관 10주년 기념 전시의 취지를 몸소 실천해내고 있었다.
이 카페는 다음달 17일부터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원형 그대로 전시 될 예정이다. 커피와 맞바꾼 사람들의 소소한 그림 한 점, 시 한편이 작품으로 걸려 교환도 이뤄진다.
“커피와 환대를 드리고 받은 그림이 미술관에 가면 관람객에게 다시 한번 선물이 될거예요. 그 중에 어떤 관람객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은 전시 후에 액자로 만들어 선물로 드릴 계획입니다”라며 전시와 함께 이뤄질 작은 이벤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 걸린 작품들 모두가 시장 상인들의 작품인 만큼 그들이 미술관을 찾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상에 미술관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또 미술관은 너무 고상하고 낯선 곳이라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시장커피 프로젝트를 통해 천작가는 말한다. 미술관은 바쁘기 때문에 가야 하고, 낯선 곳이라 더 자주가야 한다고 말이다. 마치 '시장커피'처럼 말이다.
한편 시장커피에서 모인 작품들은 내달 15일부터 열리는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 특별전 '모두에게: 초콜릿, 레모네이드 그리고 파티'에서 설치작품으로 전시될 예정이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