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장고 속에서 사과 몇 개가 나왔다. 단단했던 사과는 쭈글쭈글 말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잊고 있던 내가 한심했다. 맛보다도 붉은 빛깔을 잃어버린 것이 더 속상했다. 과일만큼 예쁜 식물이 있을까. 꽃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는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진다. 그 앞에서 과일을 구경하는 일은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요즘에는 과일가게라고 부를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예전처럼 그런 행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대형마트에 자리를 내 준 과일코너에서는 그런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일 앞에서는 침샘이 폭발한다. 봄이면 깨알 같은 씨앗이 톡톡 박힌 귀여운 딸기는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단내를 풍긴다. 무더운 여름의 푸른 수박과 노란 참외가 가득한 과일가게는 대지의 건강함을 한껏 보여주는 장소 같다. 철마다 다른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 과일가게 앞에서는 그것들을 지나간 햇살과 바람과 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생각한다. 더위와 갈증을 풀어주는 한여름의 수박 같은 사람, 빼곡한 이야기를 알알이 매달고 있는 포도송이 같은 사람, 한 입 베어 물면 새콤한 과즙이 가득 고이는 여름 끝물의 풋사과 같은 사람을. 단단한 사람, 무른 사람, 속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사람, 덤덤하지만 늘 그대로인 사람을.
과일을 좋아하지만 복숭아는 내가 먹지 못하는 과일이다. 털 알레르기 때문이다. 예민한 피부를 가진 탓에 살짝 닿기만 해도 종일 따끔거린다. 보송보송한 털이 감싸고 있는 분홍빛 복숭아는 언젠가는 극복하고 싶은 과일이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름다운 당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비와 바람을 이기고 탐스럽게 열매 맺은 과일처럼, 우리는 각자의 고난을 이기고 드러난 열매들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의 빛과 어둠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고 말 건네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과일은 혐오 속에서 자라지 않았다. 바람과 햇살과 태풍을 오롯이 견디고 여물었다. 맛과 모양과 빛깔이 다르지만 과육에 가득 담긴 비타민. 우리는 서로의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는 비타민 같은 존재들이다. 과일가게를 지날 때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제 색을 보여주는 과일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어 봐도 좋겠다. 오래전 흐릿한 전구 아래 반질반질하게 닦인 사과와 탱글탱글한 귤이 반짝이던 허름한 과일가게가 있었다. 겨울을 따스하게 밝혀주던 그런 옛날이 있었다.
“언니는 참 사람을 좋아해.” 오래전 친한 후배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정말 사람을 좋아하는가? 사는 동안 내내 혼란스러웠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서 상처 입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렸다. 냉장고 속에서 말라가는 줄도 모르고 방치한 사과를 버리지 않고 다 먹어야겠다. 과일만큼 예쁜 식물이 있을까, 사람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다시, 좋아하는 것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뜨거운 햇살과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과일이 달게 익어가고 있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내 삶의 풋내 나는 시간을 다녀간 그대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