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해발 4000미터를 훌쩍 넘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에서 국경을 넘던 날, 나는 문득 ‘선(線)’에 대해 생각했다. 산맥은 이어져 있고, 초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지만, 사람은 국경선에서 멈춰 서야 했다. 여권을 내밀고, 카메라 앞에 얼굴을 갖다 대고, 출입국 도장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 자연은 하나였지만, 국가는 둘이었다.
최근 나는 알마티에서 출발해 키르기스스탄 제2도시 오쉬를 거쳐 레닌봉 베이스캠프가 있는 아칙타쉬, 그리고 타지키스탄 무르갑과 카라쿨 호수까지 이어지는 길을 달렸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을 가르는 국경은 웅장한 산세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인위적이었다.
이 경계는 대부분 1920년대 후반 소비에트 당국이 '민족경계획정'작업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써 현재의 중앙아시아 5개국이 탄생하게 된 근거가 됐다. 당시 혁명과 내전을 종식한 소비에트정권은 그동안 응어리진 민족감정을 해소시키고 낙후된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탈바꿈시켜서 범투르크주의 또는 중앙아시아무슬람연방의 출범을 막으려는 의도로 이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 선은 목초지의 흐름을, 마을의 생활권을, 사람들의 이동 경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지금도 이어진다. 국경 지대에서는 간헐적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물과 목초지를 둘러싼 긴장이 반복된다. 특히, 초원에서 양을 몰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영토 분쟁’이라는 정치적 문제로 바뀐다. 소련은 사라졌지만, 소련이 남긴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한반도를 떠올렸다. 우리 역시 냉엄한 국제사회속 외세에 의해 그어진 선을 경험한 민족이다. 국경은 때로는 전쟁의 흔적이고, 때로는 냉전의 산물이며, 때로는 강대국 전략의 결과물이다.
3월 1일은 삼일절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외쳤던 그날을 우리는 매년 기념한다. 삼일운동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외세의 질서 속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올해 삼일절 기념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평화롭고 공존·공영하는 한반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힘의 대결이 아니라 상생의 질서를 모색해야 하며, 갈등의 구조를 넘어 협력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 메시지는 파미르에서 본 국경의 풍경과 묘하게 겹친다. 국경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질서의 압축된 결과다. 제국의 전략, 강대국의 이해, 체제 경쟁의 산물이 지도 위에 선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선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오늘날 중앙아시아는 또 다른 격변의 한복판에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역 질서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고,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확대되고 있으며, 튀르크 세계 연대도 강화되고 있다. 에너지와 물류, 군사적 균형이 동시에 요동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같은 국가들은 균형 외교를 모색하며 생존의 공간을 넓히려 한다.
특히 타지키스탄 고르노바다흐샨 지역은 아프가니스탄과 중국, 키르기스스탄이 맞닿은 전략적 요충지다. 이곳에서 국경은 단순한 통행의 문제가 아니라 안보와 직결된다. 국제질서가 흔들릴 때, 국경지대는 가장 먼저 긴장한다.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동북아 질서는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재편되고 있고, 북핵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경제와 안보가 결합된 새로운 블록화가 진행 중이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힘의 일방적 종속인가, 아니면 균형과 자율의 공간을 넓히는 외교인가.
삼일절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주란 고립을 뜻하지 않는다. 평화란 무기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의 의지를 분명히 하되, 주변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태도다.
파미르 고원에서 만난 목동은 국제 정세를 논하지 않았다. 그는 겨울 연료 값과 자녀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가 사는 마을의 운명은 국제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국경이 닫히면 시장이 위축되고, 긴장이 높아지면 교역이 줄어든다. 결국 세계질서는 개인의 삶으로 귀결된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분단은 거대한 지정학의 산물이지만, 그 영향은 우리의 일상에 스며 있다.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 투자와 교류는 위축되고, 갈등이 심화될 때 미래 세대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말하는 ‘평화롭고 공존공영하는 한반도’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경제와 외교, 안보와 문화가 서로 얽힌 복합적 과제다. 대결의 언어를 줄이고, 신뢰의 언어를 복원하며, 국제사회 속에서 협력의 접점을 넓히는 일이다.
중앙아시아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제국이 그은 선은 오래 남는다. 그러나 그 선 위에서 어떤 질서를 만들지는 결국 당사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갈등을 구조화할 것인가, 협력을 제도화할 것인가.
삼일운동이 외친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존엄한 자주’였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고립된 자주’가 아니라 ‘연결된 자주’일 것이다.
파미르에서 돌아와 맞는 삼일절 아침, 나는 다시 그 고원을 떠올린다. 산맥은 여전히 장엄하고, 국경 초소는 여전히 서 있을 것이다. 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을 경계로 삼을지, 교량으로 삼을지는 인간의 몫이다.
격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반도가 선택해야 할 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힘의 각축장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협력의 플랫폼이 될 것인가.
초원에는 본래 선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 위에서 살아간다. 삼일절의 다짐은 그 선을 넘어서는 상상력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평화롭고, 공존하며, 함께 번영하는 한반도.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설계해야 할 미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