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현대사는 상처의 연속이었다. 어디를 짚어도 아픔의 흔적이 또렷하다. 그 중심에는 외세의 개입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큰 틀에서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그 시절 용인은 어떤 방식으로 이 시간을 견뎌냈을까.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반드시 되짚어야 할 역사다. 이제 그 기억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중근 의사 유묵(安重根 義士 遺墨)
여순감옥에 근무하던 일본인 교도관 오리다 가미(折田督)가 안중근 의사에게 받아 간직해 온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오리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카인 오리다 간지(折田幹二)에게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상속했고, 이후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됐다.
유묵의 크기는 세로 100.3㎝, 가로 23㎝이며, 종이 재질은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든 선지(宣紙)에 2행 16자가 쓰여 있다. 유묵의 내용인 '욕보동양 선개정략 시과실기 추회하급(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이다. '동양을 보존하려면 먼저 정략을 바꾸어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 들 무엇하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경술삼월(庚戌三月 :1910년 3월 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旅順獄中 大韓國人 重根書)'라는 묵서와 장인(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본문 내용에는 일제 당국을 향해 침략정책의 잘못을 고칠 것을 촉구하고, 일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고취하는 뜻이 담겨있다. 안중근 의사 유묵은 안중근 개인사와 독립 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홍난파 동요 악보 원판
홍난파 동요 악보 원판은 용인시 수지구 죽전로 152 단국대학교 음악관 1층에 있다. 홍난파는 이념을 떠나 근대 한국이 낳은 천재 작곡가다.
남양군 둔지곶면(지금의 화성시 활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홍영후(洪永厚)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작곡가이며 바이올린 연주·지휘자다.
1912년 14세 때 YMCA 중학부에 들어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해 김인식한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재일 유학생들의 항일운동을 함께 했고, 귀국한 후 대한매일신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첫 창작곡집 '처녀혼'을 발표했다.
홍난파 동요 악보 원판은 그가 작곡한 동요집 '조선동요백곡집'을 발간할 때 사용한 인쇄 원판으로 나무 위에 오선보를 새긴 금속판을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각 원판의 크기는 가로 14㎝, 세로 20㎝, 두께 2㎝다. 오선보 인쇄는 특수 인쇄에 해당하는 것으로 20세기 초까지는 일본에서 인쇄됐지만 이 악보집은 한국에서 인쇄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악보 원판은 가장 오래된 악보 인쇄 원판이자 1930년 당시의 인쇄 원판 중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조선동요백곡집' 상편 50곡 가운데 '달마중'을 제외한 49곡에 해당하는 원판 51개가 남아있다.
1929년 '조선동요백곡집 제1편'을 등사본으로 발간했고, 1930~1931년까지 '조선동요백곡집 상편',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행했는데, 원판은 '조선동요백곡집'과 삽화, 쪽수, 악보체, 가사 등이 일치한다.
대표작은 ▲고향의 봄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하모니카 ▲작은 별 등이다.
◇미사일록(美槎日錄)
미사일록은 구한말 외교관의 시선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용인시 수지구 죽전로 15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있다.
19세기 말 주미공사를 지낸 이범진(1852~1911)이 1896년 6월 20일부터 1897년 1월 31일까지 주미공사로서 활동내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을 공사관 서기생 이건호가 필사한 자료다.
이범진 공사의 부임 경로와 미국 측 인사 접견 내용, 미국 주요기관과 문화시설 등을 답사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범진은 자신이 본 미국의 정치제도와 발전상, 미국의 경축일인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의 의미, 미국의 음식문화 등을 자세히 서술했다.
또 미국 역대사상 가장 치열했던 1896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직접 경험한 소감과 당시의 정치 쟁점을 잘 요약해서 기록해 놓기도 했다.
미국 탁지부의 지폐교환소, 출납소, 은고(銀庫)와 금고(金庫) 등을 둘러 보고 미국의 예산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세입액과 지출액 그리고 각각의 항목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했다.
그 밖에도 다른 외국 공사와의 교제 내용과 더불어 그 나라 특별한 사정을 기록해 놓기도 했다.
미국의 발전상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고국인 조선의 개화에 대해 "나라의 강약과 흥체(興替)는 사람에게 있고 대소에 있지 않다. 布哇(벨기에), 比利(하와이)와 같은 작은 나라도 능히 자대자강(自大自强)해 만국의 사이에서 독립했다"며 "조선은 이 두 나라와 비교해보면 지방, 인물, 재물이 오히려 낫다. 집정제공(執政諸公)이 만약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크게는 미합중국 같이 되고 작게는 布(벨기에), 比(하와이)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마음으로 개명할 것을 밤낮으로 축원한다"며 조선이 작은 나라라도 한마음으로 개명한다면 미국과 같이 될 수 있다고 개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의지, 희망을 기록했다.
주미공사로 활동한 이범진이 작성한 일기를 정서한 원본이자 유일본으로 당시 대외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또 당시 이범진의 외교활동, 당시 영어 사용 용례 및 표기, 19세기 말 지식인으로서 서양국가에 대한 인식 수준 등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장욱진 가옥
어린이 그림 같은 독특한 화풍을 남긴 서양화가 장욱진(1917~1990) 화백의 가옥은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238, 243-5, 244-2에 있다. 다만 차로 접근하기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다.
장 화백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우리나라의 1세대 서양화가다. 마치 어린이 그림 같고 동화책의 그림 같기도 하면서 표현의 세련성과 조형적 구성이 치밀한 그림을 그렸고, 독특한 화풍을 보인다.
구체적인 주제 요소는 시골의 초가·기와집·남녀노소·강아지·소·새·산·나무·해와 달 등이었고, 어린이 마음 같으면서 해학적으로 그려 자신만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 가옥은 장 화백이 198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광으로 구성된 한옥과 벽돌로 지은 양옥 1채로 장욱진 화백이 이주했던 1980년대의 이 지역은 집 앞에 얕으막한 동산이 있고 주변에 개울이 흐르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한옥은 경기도 서민 가옥의 기본 모양을 따른 튼 'ㅁ'자형이며, 원래 초가집이었던 이곳을 직접 수리해 작업실과 거주공간으로 사용했다. 건물의 골조는 한식으로 돼 있지만 지붕에는 수키와와 암키와가 하나로 돼있는 일식기와가 올려져 있다.
원래 가옥이 초가로 지어졌으므로 가옥을 이루는 구조와 부재의 크기 면에서 전통기와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일식 개량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깥채는 'ㄱ'자형으로 돼 있으며 사랑채와 광이 서로 이어져 있다. 사랑채는 대들보 위에 대공을 올리고 중도리를 2개 올린 후 두 도리 사이를 평평하게 처리한 4량가 형식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며, 정면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사랑채와 이어지는 광은 도리가 3개인 3량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돼 있다.
이상일 시장은 "용인의 문화유산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다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용인문화유산을 보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최정용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