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를 아는 어떤 이가 뉴스를 보았다. 찬찬히 세수했다. 이게 마지막 재계(齋戒)는 아닐까. 계엄이란 이름의 군사반란을 또 보는구나. 비장한 길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여, 선배가 앞장설 기회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후,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지난다. 여의도의 인파, 젊은 여성들 한 동아리가 “와, 아저씨도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응원봉 흔들어 환호했다. 그렇지, 그들(몫)의 세상이지. 마음으로 축원했다. 상황의 그런 변화는 진화(進化)일 터다.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 계엄 전에 뽑았다는데 우연이었나? 도량(跳梁)과 발호(跋扈)를 묶은 1위작 도량발호는 황당한 저들의 행태를 제대로 찍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와 석서위려(碩鼠危旅)가 뒤를 이었다. 셋 다 상황에 딱 맞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어려운 밤’을 떠올리다 문득 생각했다, 계엄 후에 선정 했다면 1위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 뽑히지 않았을까 하는 발상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비통과 무력감은 도량발호를 넘어서는 특선작이 될 수도 있었으려니. ‘저 몇 사람의 도량발호’보다는, ‘나(우리)의 전전반측의 총량’은 얼마나 참혹한가. 작년엔 ‘이끗 보더니 의리 잊더라’는 견리망의(
돌림자처럼 ‘농’자 든 세 낱말, 농단 농간 농락 등은 비슷해 보인다. 같은 뜻으로 아는 이도 있겠다. 그러나 이 말들은 각각 다른 단어다. ‘시대언어’인가? 박근혜 정권 말기처럼, 요즘 큰 유행인 ‘국정농단’의 농단(壟斷) 말이다. ‘깎아 세운 듯한 높은 언덕’이란 뜻이다. 사전에는 이런 풀이도 있다.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하는 것. 시장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물건을 사 모아 비싸게 팔아 이익을 독점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란다. 농간(弄奸)은 ‘속이거나 남의 일을 그르치게 하려는 간사한 꾀’ 즉 사기다. ‘손으로 만지며 논다’는 농(롱)과 ‘간사하다’의 간의 합체다. 희롱 우롱의 弄이 핵심 의미다. 농락(籠絡)은 ‘새장과 고삐’라는 뜻, 남을 교묘한 꾀로 휘어잡아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시쳇말로 ‘가지고 논다’는 말이다. 대충 바꿔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은 아니다. 한자(漢字)도 다 다르다. 계통이 같거나 비슷한 말로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그러나 공공(公共)의 도리나 개인 간의 이해(利害) 등 여러 세상사에서 품격이 현저히 떨어지는, 악질 또는 저질적 행실인 것이 셋의 공통점이다. 언론 등 현장에서의 단어의 용례(
“축제에 웬 고사? 안 어울리게...” 축제의 개막, ‘고사’ 순서에 내로라하는 이들이 한복입고 나와 절과 술잔 올리더라. 이렇게 의아해 하는 축은 아무래도 젊은 층이다. 이태원 참사의 그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게 축제 아니냐, 그런데 왜? 멋진 파티, 잔치 분위기 축제에 꿀꿀하게 돼지머리에 절을 하다니, 대충 이런 볼멘소리다. 카니발(carnival) 피트(fete) 피에스타(fiesta) 피스트(feast) 페스티벌(festival) 주빌리(jubilee) 등 멋지게 들리는 외국 이름의 잔치라야지, 웬 고사야. 축제는 축제다워야지... 설레고 좋은 일, 상서로운 느낌이나 ‘노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그런 느낌 불렀겠다. 그런데, 말의 뜻을 보면 뜻밖의 사실과 만난다. 어떤 게 ‘축제다운 것’인지 그 본디를 볼 일이다. 문자(글자)에 그 뜻이 있다. 외국 산(産) 저 ‘파티’들의 의미도 다시 볼 일이다. 저 축제의 이름들은 여러 지역에서 자신들의 신(神)에게 뭔가를 바라는 기원(祈願)의 이름들이다. 세상의 어떤 유명한 신도 처음에는 자기 동네 특유의 (토속적인) 기원의 대상이지 않았던가. 종교나 신앙이라고 하는, 더러는 무속(巫俗)이라고, 좀 비하해
과거-현재-미래를 이르는 다른 이름인 어제-오늘-내일 중 하필 내일만 한자로 된 말이어서 늘 얘깃거리가 된다. 그 來日은 ‘온다’는 뜻의 한자 래(來)와 해(태양)를 이르기도 하는 말인 ‘날’ 일(日)의 합체다. ‘내일’을 대신할 ‘하제’란 말이 최근 젊은이들의 생활언어로 펴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 복원하는 일은 의미 있다. 이 말은 고려 때 중국 사람이 쓴 고려 말(언어) 교본(계림유사)에 명일왈할재(明日曰轄載)라는 대목을 주목하여 우리 언어학이 찾아낸 것이다. 고려시대 당시 내일(의 발음)이 ‘하제’였다는 것이 문자학자 故 진태하 교수의 연구결과다. 저 대목은 ‘고려 사람들이 명일(明日 내일)을 ’할재‘라고 하더라(曰 왈)’는 중국 사람의 기록이다. ‘할재’의 당시 중국말 발음이 ‘하제’였다는 것이 진 교수 연구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고려 때 사람들은 내일은 하제라고 했다, 즉 당시 내일 뜻의 우리말(발음)은 하제였다는 것. 소리를 표시하고자 활용한 말이니 ‘할재’의 의미를 따지는 건 의미 없겠다. 비슷한 말이 또 있다. ‘하제’와 발음이 비슷한 ‘아제’가 ‘내일’의 원래 우리말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광복절 앞둔 지난 14일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일본제국주의 강점기를 미화한 영상을 상영한 교사가 경고 조처에 이어 수업에서 배제됐다. 학교장은 사과했고, 시교육청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고 했다. 보도된 내용이다. 그날 전교생 700여 명 중학생들은 60대 교사가 튼 일제강점기 관련 12분 가량의 동영상을 당혹감 속에서 보았다. 이 영상물은 ‘오늘날 한국인 대부분의 인식과는 달리 총독부가 한반도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많은 투자를 했다’, ‘일제에 의해 사법제도가 정비되고 개인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일제가) 한반도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깨어나게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일제가 뿌렸을 법한 속 검은 소문, 지들이 이러저러한 혜택을 주었다는, 뻔한 식민지근대화론이었다. 노골적 '친일' 주장에 학교는 뒤집혔다. 학생들이 항의했고, 학부모들도 '편향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보도된 내용이다. 장황하게 보도를 인용한 것은 이런 사태가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을 교사에 의해 빚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의 논의 이전에, 알 만한 이들이 초보적인 경제 개념을 몰랐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을 법하다는 사실을 걱정하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 중
얼마 전 KBS 라디오 고전음악 채널 ‘클래식 FM’에서 진행자의 황당한 얘기에 놀랐다. 서양음악만 틀다가 유일하게 우리 음악을 들려주는 ‘FM 풍류마을’ 시간, 큰 작곡가로 가야금 명인인 전(前) 이대 교수 고(故) 황병기 선생의 ‘침향무’를 들려주면서 곁들인 설명이었다. “침향은 ‘외국’에서 들여오는 향의 이름입니다”라고 했다. 외국에서 사오는 것이라는 얘기다. 운전 중에 얼핏 들었던 터라 ‘인도(인디아)’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야금 곡인 황병기 작곡 ‘침향무’의 침향이 인도나 아니면 다른 외국 어떤 나라에서 (현재) 수입되는 향(香)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설명이었다. ‘몸에 좋다’는 물질(제품)은 유행을 탄다. 미용도 정력 강장도 그렇지만 요즘은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이런 유행 이끈다. 경험 상, 오래 가지는 않는 ‘돈벌이’ 관련 유행이다. 패션(fashion) 축에도 못 끼는, 영어로 패드(fad)라고 하는, 스쳐 지나는 짧은 유행일 터다. ‘메뚜기 한 철’ 같은 그런 제품의 속성 때문에 두루뭉술 장점(長點)만을 강조(과장)하는 것이 이런 제품 광고의 특징이다. ‘침향*’과 같이 침향이란 것이 ‘몸에 좋다’는 온갖 유혹적인 언사(言辭)와 함께
‘부음알림’이란 문자메시지를 자주 받는다. ‘부고알림’도 꽤 있다. 한자어인 부음(訃音)과 부고(訃告)에 우리말 알림을 덧댄 말이다. 차츰 공식용어처럼 굳어지는 모양새다. 언론 등의 담당자들이 한자에 덜 익숙해서 빚어지는 상황이리라. 비슷한 사례, 장례의 절차인 발인(發靷)을 어떤 이들은 ‘발인식’이라고 ‘식’을 붙여 쓴다. 발인이 상여(喪輿)를 떠나보내는 의식(儀式)이니 좀 우스꽝스런 뜻(모양)이 됐다. 췌사(贅辭)나 췌언(贅言)이라고 한다. ‘췌’는 군더더기란 뜻. ‘역 앞’인 역전(驛前)에 ‘앞’을 덧붙인 역전앞 같은 말이 그것이다. 처갓집도 있다. ‘없어도 될 말’은 어쩌면 ‘옳지 않은 말’일 수 있다. 허나 언중(言衆)들이 자주 쓰면 ‘틀린 말’이라고 단번에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나 작가 등 언어를 생산하거나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최소한 이를 (손으로 잡아 쥐듯) 파악(把握)하고 있어야 한다. 왜 그러냐고? 뭘 쥐느냐고? 訃(부)는 ‘죽음을 알린다.’는 뜻의 단어다. 한자는 하나하나가 독립된 낱말이다. 말씀 언(言)과 점칠 복(卜) 두 단어가 만나 새로운 한 단어를 이뤘다. 그림에서 비롯한 한자를 짜서 맞추는, 특유한 문자
저런 글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런 대목 또한, 고참 기자로서 부끄럽다. ‘충돌과 추돌’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두 단어의 차이를 모르고 쓴 글이 의외로 많다. 졸음운전 사고가 많은 계절, 대개 뒷 차가 앞 차를 들이받는 ‘추돌’이다. 다녀보니, 졸음운전 현실은 자못 심각하더라. 말(의 바탕)에는 뜻이 있다. 또 일점일획(一點一劃)에 뜻이 없는 글자는 없다. 의미를 잃은 말글은 세상을, 자신도 망칠 수 있다. 기자 작가 공보직 등 ‘생산자’의 언어는 더 그렇다. 충돌이나 추돌이나, 그게 그것 아니냐고요... 대충 알고 쓰는 말, 언어생산자에겐 독약이다. ‘말’의 마땅한 지식 없이 ‘글’을 만들겠다는 건, 음치(音癡)가 섹시한 몸매와 용모만으로 가수(歌手)한다고 나선 격이다. 언치(言癡) 기자나 작가를 상상할 수 있을까? 정부의 언어당국 국립국어원도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인지, 한심하고 안타깝다. 충돌 추돌의 구분(區分)에 대한 ‘유권해석’을 (정부당국이) 저렇게 내린 것이겠다. 다음은 ‘전봇대를 들이받은 것은 추돌이다.’라는 취지의 국립국어원 ‘생산’ 문건에 대한 해설이다. 몇 줄 인용한다. ‘충돌'은 서로 맞부딪치거나 맞섬을 의미하
왜 경기 광주(廣州)는 길게 [광:주], 광주(光州)광역시는 짧게 [광주]일까? 며칠 전 KBS 라디오 ‘클래식 FM’의 국악 프로 ‘풍류마을’을 듣다 황당했다. 진행자가 “... (아무개 씨가) 소금을 분다”고 말했다. 혹 “소금을 탄다” 했는지도 모르겠다. 얼핏 흰 소금을 (입으로) 불거나 (손으로) 음식에 타는(섞는) 것을 상상했다. 음악 얘기이니 악기 소금(小笒)이면 (피리처럼) ‘~을 분다’, 소금(小琴)이면 (가야금처럼) ‘~을 탄다’고 했겠다. 그런데 짧게 [소금]이라 했으니 소리가 같은 짠 [소금]과 구별할 수 없었다. 방송이 틀린 것이다. 불든(吹奏 취주) 타든(彈奏 탄주), 소(小)는 긴소리(長音·장음)로 [소:금]이라 해야 맞다. 선거 때 방송에서 이 ‘광주’와 저 ‘광주’가 대체로 구분 없이 (대개 단음 [광주]로) 마구 튀어 나왔다. 경기도엔 광주(廣州)시가 있고 남도에는 광주(光州)광역시가 있다. 평소에도 방송 등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빚는 주제다. 그렇다고 매번 ‘경기도 광주’ ‘광주광역시’ ‘남도 광주’ 이렇게 부르기도 번거롭다. 그리 부르더라도 바른 발음은 챙겨야 한다. 한글 철자가 같아 생기는 사달이다. 구별이 어려워 저 ‘광
정치 계절, 요즘 자주 듣는 말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는 많은데 덕은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엔 꾸중이었다. 어른의 저 말씀은 무서웠다. 인격포기의 (최종적) 판단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다른가. ‘사람이, 깊이가 있어야지...’ 하는, 부정적 평가임은 여전하다. 가령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의당 ‘덕이 부족한’ 이는 아웃이다.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깊이는 좀 부족해도, 재주는 뛰어나니 그나마 써먹을 구석이 있겠지’하는 기분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요즘 말뜻도 짐작되는 분위기다. 부끄러움 모르는 사람들이 나란히 윗줄에서 요란 떠는 세상, 재주 있어서 인기만 높으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랴. 재주가 힘(권력 또는 주먹)도 갖췄다면, 이는 진짜 잘나가는 것일까? 우기면, 거짓말도 억지도 진실처럼 언론에 나가는 걸 보면, 세상은 어디로 흐를까? 아서라, 애들 볼라. 다음 시기에 저런 이들 얼마나 꼴사나운 비난의 대상되어 세상을 웃길까? 재승덕박의 원래 말 재승덕(才勝德), 재주(才)가 덕성(德)을 이긴다(勝)면, 막말로 막가는 세상이다. 하릴없이 골로 가리라. 다만 시간의 문제다. 백 살쯤 살면 철들었을 테니 알겠지. 말에는,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