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를 아는 어떤 이가 뉴스를 보았다. 찬찬히 세수했다. 이게 마지막 재계(齋戒)는 아닐까. 계엄이란 이름의 군사반란을 또 보는구나. 비장한 길을 나섰다. 천지신명이여, 선배가 앞장설 기회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후,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지난다.
여의도의 인파, 젊은 여성들 한 동아리가 “와, 아저씨도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응원봉 흔들어 환호했다. 그렇지, 그들(몫)의 세상이지. 마음으로 축원했다. 상황의 그런 변화는 진화(進化)일 터다.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四字成語), 계엄 전에 뽑았다는데 우연이었나? 도량(跳梁)과 발호(跋扈)를 묶은 1위작 도량발호는 황당한 저들의 행태를 제대로 찍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와 석서위려(碩鼠危旅)가 뒤를 이었다. 셋 다 상황에 딱 맞는다.
여러 사람들이 보내고 있는 ‘어려운 밤’을 떠올리다 문득 생각했다, 계엄 후에 선정 했다면 1위로 전전반측(輾轉反側)이 뽑히지 않았을까 하는 발상이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비통과 무력감은 도량발호를 넘어서는 특선작이 될 수도 있었으려니. ‘저 몇 사람의 도량발호’보다는, ‘나(우리)의 전전반측의 총량’은 얼마나 참혹한가.
작년엔 ‘이끗 보더니 의리 잊더라’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왜(倭)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아 처단한 안중근 장군의 그 글씨 견리사의(見利思義)의 반대편에 서는 말이다.
그런데, 관련기사 살피다가 특이(特異)한 점을 보았다. 일부매체가 도량발호는 한자 ‘跳梁跋扈’ 사진 올리고, 본문은 한글로만 썼다. 후안무치와 석서위려는 아예 한글로만 적었다. 작년의 견리망의 기사도 일부는 역시 한자 없이 한글로만 적혔더라.
특기(特記)할 사항이라 본다. 문해력이 문제라는데, 발음(기호)만으로 뜻을 풀까? 어차피 모르는 말이니 그냥 지나쳐? 좀은 의도적으로 단어들을 선택한 이 글도 그런 걱정을 품는다.
한자 배우지 않은 세대와의 소통부재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일 터다. 당장 급하지 않다고 미뤄두니 치유나 개선이 더 어려워진다. 그런데도 기성세대는 고사성어 따위의 유식한 ‘말씀’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세대를 위한 정책의 배려도 없다.
도량발호는, 물론 1위작이니 간단한 해설은 기사에 붙어있었다. 한글로 쓰인 후안무치가 뭐지? 대충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이겠지. 하지만 석서위려는? 견리망의나 견리사의는? 特異와 特記는 같은가? 재계 계엄 축원 장삼이사 따위는 뭐고, 왜 그런 뜻이 쓰일까?
이 또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일(전전반측) 상황이다. 전전반측,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에 나오는 시 한 대목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익숙한 말의 초나라 노래(歌)의 대표적인 것이 국풍이다. 이런 따위, 전에는 ‘상식’이었다.
연말연시엔 ‘원단’ 들어간 인사 무성하다. 元旦은 ‘새해 첫 아침’의 비유적 표현이다. ‘문자(질) 좋아하는’ 선배들의 저 유식한 인사에 다만 멀뚱한 후배들 표정의 의미는 뭘까?
언어가 바르게 전해지지 않아 세상이 비뚤어지는 건 아닐까. 말과 글이 겨레의 혼이라며. AI시대에는 국어공부도 필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