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법정에 섰다. 죄명은 절도였다. 범행 장소는 동네 상점이었고 훔친 물건은 몇 봉지의 빵이었다. 잡혀간 경찰서에서 할머니는 며칠 째 굶고 있는 손자들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딸은 병들어 누웠는데 집 나간 사위는 연락조차 없다고 덧붙였다. 딱한 사정이었음에도 상점 주인은 처벌을 원했다. 본보기를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범죄 사실과 함께 범죄 동기 또한 법정에서 다시 진술되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출입기자는 ‘현대판 장발장 사건’이라며 기사를 작성했고 방청객들은 판사의 선처를 기대했다. 하지만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말투는 단호했다.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어서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유였다. 판사는 할머니에게 10만원의 벌금형을 내렸다. 판결문을 다 읽기도 전에 방청석이 요동쳤다. 돈이 없어 빵을 훔친 할머니에게 10만원의 벌금형은 가혹한 처벌이었다. 벌금을 내지 못한다면 교도소에 들어가 노역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성토의 목소리가 판사를 향해 쏟아졌다. 손가락질을 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판사는 망치를 두드려 소란을 잠재우고 나머지 판결문을 읽었다. “배고픈 이웃이 거리를 헤매는데, 나는 기름
직업에는 귀함과 천함이 따로 없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는 말도,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노동을 이윤창출의 수단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눈가림용으로 만들어낸 삿된 꿈이다. 그 삿된 꿈에 취해,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을 참아내게 하려는 마약성분의 처방전일 뿐이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가난은 죄악이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가난한 자의 눈에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역시 헛소리다. 용은 개천에서 나오지 않고 강남에서 나온다. 노동자가 평생 벌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강남에서는 집 한 채 사고 팔면 뚝딱 벌어들인다. 성공의 조건은 노력(努力)에 있지 않고 재력(財力)에 있다. 당연히 인격보다 돈이 대접받는다. 2010년, 거액의 회사 돈을 빼돌린 그룹 총수가 254억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룹 총수는 벌금 낼 돈이 없다고 배를 내밀었고, 판사는 벌금 대신 일당 5억 원짜리 노역을 허락했다. 벌을 받기는커녕, 그룹 총수는 하루에 5억 원씩 벌금을 털어내는 수단으로 교도소를 이용했다. 황제노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문제의 사건과 판결이었다. 돈이 서고 사람이 추락하는 세상
골목은 집과 집이 돌아앉은 등뼈 같다. 깜깜한 밤, 돌아앉은 집의 온기는 담 안으로 고이고, 온기로부터 소외된 골목에 가로등 불빛만 서성인다. 서성이는 것들은 서성임으로 고독을 견디는 법이어서 멈추지 못하고 담을 따라 걷는다. 돈벌이에 지친 살림살이가 좁은 담과 담 사이를 따라 길이 되어 흐른다. 돌아앉은 등뼈와 등뼈 사이에서 기도할 의미조차 상실한 길이 고개를 수그린다. 골목길이 꾸부정 걷는다. 반듯하게 걸을 수 없어서 골목길이 내뱉는 숨소리는 고달프다. 비틀리고 꾸부정한 골목길을 걸을 때, 걷는 것들의 어깨는 담과 담의 틈에 짓눌려 주눅이 든다. 내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떠날 때,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한참 젊었다. 나보다 젊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건 암癌때문이었다. 위장에서 시작한 암은 췌장과 소장을 따라 번지다가 길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암세포들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멀쩡해야 할 정상세포를 차례로 죽였다. 세 번째로 수술대에 올랐을 때, 의사는 손을 쓰지 못하고 열었던 수술 부위를 그냥 덮었다. 마약성분이 첨가된 진통제를 처방 받았음에도 퇴원한 아버지는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숨을 거둬들일
생각처럼 쉬운 게 또 있을까. 자본이 주인인 세상에서 생각은 값을 쳐주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무엇을 생각하던 혹은 생각하지 않던 온전히 공짜다. 공짜일 수 있는 자유가 생각에 있어서인지, 세상에 쏟아지는 것들을 보면 공기처럼 가볍다. 대표적인 게 말과 글인데 말과 글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소리로 그치지 일쑤다. 소리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들이 쏟아내는 것이 소리다. 비와 바람이 그렇고 짐승과 자동차 심지어 파리와 귀뚜라미도 소리를 뱉는다. 물론 그렇게 뱉어내는 소리 가운데는 인간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것들도 있다. 그렇게 쏟아내는 인간의 소리를 우리는 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말은 소리의 일종이다. 그럼에도 말을 소리와 구분하는 까닭은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처음 만들어낸 인간들도 의사소통을 위해 생각이 필요했다. 무엇이라고 부를까. 부르기 위한 것들은 자연현상에도 많았고, 사물이나 느낌에도 적지 않았다. 생각 끝에 인간들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부터 한 글자씩 차례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몸, 물, 불, 숲, 산, 길, 집, 밥, 땅, 일, 힘, 땀, 꽃, 별, 달, 해,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