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트남에서 만난 아주 인상적인 화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섯 살 때부터 천재적인 미술신동으로 주목을 받은 화가 탄증은 열 살에 미술영재학교에 입학했다. 7년 과정의 미술영재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조국은 전쟁 중이었다. 17세였던 그는 많은 그 또래의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원입대했다. 붓을 내려놓고 소년병사가 된 미술신동이 만지기 시작한 것은 폭탄이었다. 탄증이 배치받은 부대는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꽝닌이었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폭탄해체였다. 미군이 투하한 불발탄을 해체하는 일은 가장 위험한 작업의 하나였다. 사방에 깔린 지뢰의 뇌관을 제거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해체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실수만 해도 자신의 온몸이 해체되는 작업을 그는 무려 10년 동안이나 했다. “10년 동안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단 두 달이었다.” 전쟁터에 있었던 10년 동안의 일을 묻는 나에게 그가 한 대답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두 달을 제외한 10년의 나머지 세월을 그는 오로지 폭탄을 해체하며 보냈다. 미국이 베트남에 쏟아부은 폭탄은 2차 세계대전에서 양 진영이 사용한 폭탄을 모두 합한 것보다 2.5배가 많은 양이었다. 그가 해체해야 할
돈을 많이 버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잘 쓰는 일이다. 큰 자산을 모은 사람은 많아도 잘 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냥 잘 쓰는 것을 넘어 의를 위해 잘 쓰는 일은 더욱 어렵다. 자신이 가진 재산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을 불러들이는 일에 나서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하고 의를 위해 가진 것과 누리던 것을 내놓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식민지 시대에도 그런 드문 의인들이 있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진 이회영 형제가 대표적이다. 삼한갑족으로 불리던 이회영의 6형제는 막대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회영의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해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끌었던 안동 권문세가의 종손 이상룡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가문은 알아도 최진동 형제를 아는 사람은 아직도 드물다. 최진동은 전통적인 명문가의 자손이었던 이회영이나 이상룡과는 달리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총명하고 의기가 높았던 그는 주변의 신뢰를 얻었고, 중국의 공직에도 진출했다.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아버지의 친구였던 중국인 부자는 그를 양아들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른 사람과 미리 정하여 두는 일을 약속이라고 한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크든 작든 대부분의 일은 이미 약속에 따라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약속을 저버리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사람 관계가 험악해진다. 사람이나 조직체 사이에 서로 지켜야 할 의무를 글로 명시하여 법률로 책임을 지도록 한 계약은 지켜야 하고 그렇지 아니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만연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약속은 인격을 담보로 하는 것이고 계약은 법률적 강제를 담보로 한 것이다.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법률적 책임만 지면 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인격의 훼손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법률적 책임보다 인격을 점점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이 심각성을 주목하는 사람도 드물다. 약속을 가볍게 저버리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의 인격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다.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약속을 두렵게 여기고, 어려워도 약속을 지킨다. 한국사회가 기억해야 할
올해 8월에도 일본 총리는 전범들의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도 희생된 개인과 이웃 나라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 나는 8월을 보내며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상룡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이준형이다. 이제는, 안동 권문세가의 장자이자 지주였던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제법 많아졌다. 이상룡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가산을 처분한 다음 집안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회영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도 그였고, ‘항일무장투쟁’을 네 번째 차례에 놓으려는 상해 임시정부의 강령을 첫 번째로 바꾸도록 한 것도 그였으며, 서로군정서를 조직한 것도 그였다.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번화한 도시 상해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노구를 이끌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서간도에서 항일무장 투쟁의 최전선을 지켰던 이상룡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젊은 투사들을 먼저 걱정하고 챙겼던 그는 누구보다 아끼고 믿었던 젊은 동지 오동진과 김도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이상룡은 그와 더불어 싸워온 젊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공로도 남기지 못
어느 시대나 신분 상승은 어려웠다. 자신이 처한 불우한 환경을 딛고 남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그만큼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얻은 성취는 더욱 소중하고 빛난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자신이 얻은 성취를 타인을 위해 내놓는 일이다. 얻는 일보다 내놓는 일이 훨씬 어렵다. 자신의 노력으로 신분과 처지를 바꾼 사람들은 드물다. 자신이 얻은 성취를 어제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 드물고 드문 사람의 하나가 박서양이다. 박서양은 1885년 9월 30일,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정과 백정의 자식은 호적조차 부여받을 수 없는 최하층 계급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이름도 성도 없이 ‘봉주리’로 불리던 그에게 뒤늦게 ‘박서양’이란 이름과 호적이 허용된 것은 저절로 세상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대대로 백정이었던 박서양의 아버지는 돈으로 자기 아들 하나의 신분을 사는 대신 갑오개혁으로 시행되던 신분차별 철폐법을 모든 백정에게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운동에 앞장섰다. 백정 아버지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존재를 인정받고 이름과 호적을 얻었던 소년은 조선 최초의 서
김숙경은 함경북도 경원군 양하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1897년 가족들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떠났다. 기울어가는 조선에서 가난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열두 살이던 김숙경도 살길을 찾아 조선을 떠나는 가족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김숙경을 데려가지 않았다. “넌 이미 다른 집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다.” 한 해 전, 11살이던 김숙경을 이웃에 사는 황천금이와 혼약을 맺게 한 그녀의 부모였다. 그녀보다 한 살 위인 천금이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돈 벌러 간다며 러시아와 만주를 떠돌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천금이는 잠시 집에 들렀다. 남편 천금이는 항일투사가 되어 있었다. 야속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살아온 천금이가 자랑스러웠다. 천금이는 금방 다시 떠났고, 아이가 생겼다. 아들이 태어나고, 천금이가 다녀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김숙경과 시아버지를 잡아가 가두고 고문했다. 집문서와 얼마 되지 않는 땅문서까지 모두 빼앗기고 갓난아이마저 잃은 김숙경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한밤중에 고향을 떠났다. 연해주의 연추에서 만난 천금이는 김숙경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숙경씨.” 천금이는 아내 김숙경을 언제나 그렇게 불렀다.
지난 5월 19일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이 태어난 날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3년이 지났지만 바딘광장에 있는 그의 영묘에는 참배객들의 줄이 끊어지지 않는다. 호찌민에 관한 글을 여러 번 쓴 적이 있는 내게 베트남통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한국 작가로서 호찌민이 지닌 가장 큰 가치와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 번째 질문이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호찌민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한 사람이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지도자는 많았지만 인민을 위해 산 지도자는 매우 드물었다. 호찌민은 그 드문 지도자 중에서도 매우 특별했다.”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베트남에서 살았던 여섯 개의 집에 모두 가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응애안의 작은 시골집은 베트남의 전형적인 농가다. 베트남의 최고액권인 50만 동 지폐 뒷면에 찍힌 야자나무 지붕의 소박한 바로 그 집이다. 내가 가본 호치민의 두 번째 집은 베트남 남부에 있는 해변도시 판티엣의 야간학교였다. 그는 베트남을 떠나기 전에 늑맘(젓갈)생산지로 유명한 판티엣의 젓갈공장 부설 야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내가 오래전 비 오는 날 산길을 달려 찾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 칼레드 호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 소설 안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소설과 신화가 나온다. 소설 안의 소설과 신화 모두 아이러니를 그 자체다.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소년 아미르가 처음으로 쓴 소설은 마법의 잔을 발견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마법의 잔에 눈물을 흘리면 눈물이 진주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울려고 노력했다. 비록 가난해도 늘 즐겁게 살아온 남자였기에 눈물을 흘리기 쉽지 않았다. 그는 매일 슬퍼질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찾았다. 나날이 진주가 늘어갔지만 사내는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사내는 산더미처럼 쌓인 진주 옆에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칼을 손에 든 채, 아내의 시체를 안고 하염없이 진주 눈물을 흘린다. 진주를 만드는 행운의 잔이 그의 삶에서 웃음을 완전히 빼앗아가고 끝내는 아내마저 살해하는 괴물을 만들고 말았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마법의 잔을 손에 넣은 남자의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는 요즘 우리 사회가 자꾸 겹쳐지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되는 마법의 잔처럼 남을 끔찍하게 욕하고 증오하면
젊은 날 빛나고 아름다웠던 사람이 나이 들어가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해지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난다. 한때 안중근 참모중장의 가장 가까운 동지의 한 사람이었던 엄인섭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건너가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공 작전을 펼쳤던 독립군 대장이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게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크게 이겼던 홍범도의 결의형제이기도 했다. 홍범도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 남은 젊은 시절의 엄인섭은 누구보다도 훤칠하고 멋진 남아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일본의 밀정이 되어 독립군을 팔아넘기며 비루하게 살다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무엇이 한 아름다웠던 청년을 그토록 추하고 불쌍하게 만들었을까. 흔히 사람들이 변절과 타락으로 자신의 삶을 더럽히는 이유를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추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밀정이 된 자들이 변절한 가장 큰 이유는 실망하거나 절망해서였다. 변절자들은 보통사람보다 대체로 훨씬 유능하고 성실했다. 그들이 변절하는 이유는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실망하고 절망하고 원망해서였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세상이
겨울의 끝자락이다. 마지막 추위가 매섭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페티카, 그는 함경도에서 태어난 노비의 아들이었다. 아홉 살 나던 해 가족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러시아 초등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고려인이었다. 온 가족이 나무를 캐내고 돌을 주워내며 밭을 일구었지만, 세끼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그가 가출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던 그는 무작정 연해주 최남단의 항구도시 포시에트로 갔다. 하지만 어린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굶주린 채 지쳐 쓰러진 그를 구해준 사람은 러시아인 선장 표트르 세묘뇨비치였다. 페티카는 표트르 세묘뇨비치 선장을 따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의 흐름과 물정을 익혔다. 표트르 세묘뇨비치의 부인은 배에서 내린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주었다.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한 그는 표트르 세묘뇨비치 부부의 양자가 되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러시아에 귀화한 그의 정식 이름은 초이 표트르 세묘뇨비치였다. 19세기 말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 중에 최초로, 유일하게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사업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