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자신의 저서를 마르크스 주의 비판을 위해 썼다. 그가 이 책을 썼던 때는 1945년이다. 나치의 잔혹함을 경험했고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를 목격했다. 칼 포퍼의 이론은 소위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하곤 한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그럴 듯 하게, ‘좀 있어 보이게’ 하려는 사람들은 칼 포퍼를 아는 척 한다. 특히 개신교 이론가들이 포퍼의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대립 개념을 내세우곤 한다. 아이러니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론을 내세우는 집단들, 정당들, 교회들이 오히려 닫힌 사회의 행태를 더욱 적극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른 정당의 대표와 정치인들을 무리한 법조항을 내세워 활동을 규제하려 하는 것은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동성애,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개신교들의 집회는 그걸 지켜 보는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만든다. 나치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동성애자 역시 상당수 태워 죽였다. 그 역사를 애써 외면하려 하는가. 한 사회가 열린 사회인지 닫힌 사회인지를 바로 알 수 있는 길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 특히 지도급 인사들이 문화와 예술을 대하는 태도이다. 한국 사람들 중 일
미국 캐나다 산 영화 ‘롱 레그스’는 요령부득의 영화이다. 이 영화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를 잠깐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영화가 시작된 지 57분이나 지나서이다. 주인공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상관인 카터(블레어 언더우드)가 요약을 해 준다. 둘은 FBI 요원이고 리 하커는 신참이다. 마치 과거 조너던 드미 감독이 만든 ‘양들의 침묵’(1991)에서 팀장인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와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의 관계와 같다. ‘양들의 침묵’에서 둘은 버펄로 빌이라는 연쇄 살인범의 뒤를 쫓는다. 이번 영화 ‘롱 레그스’에서 리 하커는 카터와 함께 가족들만 골라 연쇄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일명 롱 레그스라는 이름의 살인범을 추적한다. ‘롱 레그스’는 기본적으로 ‘양들의 침묵’의 저예산 버전이고 여성 수사관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가져오되, 다소 비틀어서 가져온 작품이다. 그만큼 서로 같은 척, 사실은 상당 부분 다른 모습과 느낌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롱 레그스’는 그런 의미에서 ‘양들의 침묵’보다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2018)을 더 닮아 있다. 일종의 사탄 숭배(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 사탄(학) 영화이다.
구룡성채의 원래 이름은 구룡채성이다. 九龍寨城. 채는 울타리 채 자이다. 구룡에 있는 울타리로 쌓은 성이란 뜻이다. 현대에 이르러 좀 더 알기 쉽게 구룡성채, 九龍城砦로 바뀌었다. 구룡반도에 있는 일명 마굴(魔窟), 최악의 슬럼가였다. 1993년에 철거돼 지금은 공원으로 돼있다. 국가의 법, 사회의 공권력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치외법권 지역이었으며 갱단 조직인 삼합회가 운영했던 곳이다. 그 얘기를 다룬 것이 바로 ‘구룡성채 : 무법지대’이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삼합회와 또 다른 특정 세력인 범죄 조직과 그 우두머리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그린 내용처럼 꾸며져 있다. 실제로 홍콩 영화 특유의 과도한 권법 액션과 잔혹한 폭력의 장면으로 점철돼 있다. 영화 마케팅도 과거 1980년대 홍콩 누아르를 추억하거나 여전히 추앙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짜여 있다. 영화의 겉만 보면 좀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속 내용이 겉보다는 좀 더 깊다. 어마어마한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홍콩인들이 지금의 홍콩, 더 나아가 중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지금의 중국 시진핑 정부가 홍콩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홍콩 사태,
얼마 전 열린 부산국제영화제가 역사극 ‘전, 란’을 개막작으로 내세운 것은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다소 의미심장한 이야기일 수 있다. ‘전, 란’은 조선 선조 때의 이야기로 일본의 침략, 곧 임진왜란 당시 내우외환의 혼란스런 정변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그러나 왜군(倭軍)과의 전쟁보다는 선조라는 지도자의 무능과 부도덕 그를 타파하려는 대동계의 반란, 그 조직을 만든 정여립의 사상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정여립의 대동주의는 일종의 생시몽 식 사회주의로 흔히들 몽상적 사회주의로 불리운다. 생시몽 주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왔지만 정여립의 사상은 16세기 조선에서 나왔다 더 빠르다. 노비와 양반이 하나되는 세상,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정여립은 당연히 반역죄로 참수됐으며 영화 ‘전,란’의 오프닝 씬은 그의 목에 칼이 꽂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정여립은 현재의 전라북도 장수군 신전마을에서 목이 잘렸다. 영화 ‘전,란’의 원래 제목은 ‘전쟁과 반란’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너무 직설적이라 판단했을 것이고 그래서 줄인 것으로 짐작된다. 세상에 대한 반역, 임금에 대한 모반, 위정자들을 향한 혁명을 다소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제작은 블랙리스트 감독 출
중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타쿠미 아사(하야세 이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가 됐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성격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이모 코다이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아이에게 화난 목소리로 대야는 한자로 관(盥)이라고 쓴다며 관은 절구 구(臼)에 물 수(水), 접시 명(皿) 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키오는 죽은 언니 미노리(나카무라 유코)와 의절한 채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년 소설 작가인 듯이 보이고 작품이 웹툰 등으로 만들어지는 등 성공한 작가여서인지 자립해 살아가고 있다. 자립해서 독자적으로 산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깥 세계는 차단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기적인 고독일 수 있다. 당연히 이모 마키오와 조카 아사의 동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타 나츠키 감독의 ‘위국일기’는 야마시타 토모코의 순정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왜 일본의 이야기 문화가 단행본 만화나 웹툰이 기반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영국 유명 작가 닉 혼비의 소설 『벌거벗은 줄리엣』을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 2018년 작품이지만 뒤늦게 국내 개봉된 ‘줄리엣, 네이키드’는 여러 층위를 깔고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음악영화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맨스 물이고 조금 더 생각해서 들여다보면 인생에 대한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기대하지 않고 골랐다가 의외의 케이크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맨 위에는 초콜릿이 얹혀 있고 그 밑에는 달콤한 크림이, 그 안에는 푹신한 느낌의 빵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많이 먹으면 느끼하지만 적당히 한두 조각을 먹으면 뇌를 활성화시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유의 영화, 곧 멜로 영화가 지닌 순기능적 특성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로맨스 작품을 봐야 한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 보려고들 한다. 그것이 아무리 판타지에 불과하고, 궁극의 거짓말인데다, 결국 헤어짐으로 끝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러브 스토리에 열광한다.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줄리엣, 네이키드’의 기본 로그 라인은 “1993년에 미니애폴리스의 한 클럽에서 공연 도중 갑자기 사라진 미국의 전설적인 록 가수 터커 크로우(에단 호크)에 대한 이
영화 ‘딸에 대하여’는 엄청나게 관객이 몰릴 상업영화는 아니지만 독립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을 중심으로 조용히 화제를 얻을 작품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엉뚱하게 뉴스를 타고 있다. 대전여성영화제와 관련해서이다. 영화의 공식 개봉은 어제(9월4일)였으나 오늘과 내일 이틀간 열리는(9월5~6일) 이 여성 영화 행사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다. 문제는 대전 시이다. 시가 지원하는 보조금 1350만원의 반납을 고리로 영화의 상영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 대전 시의 주장이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동성애자인 딸이 자신의 파트너를 집에 데리고 들어 오면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엄밀하게 이야기 하자면 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딸을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딸의 성 정체성을 새롭게 알게 된, 그래서 자신의 성 인지 정체성에 대하여 새삼 깨닫고 돌아 보게 되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이다. 담담하고 성찰 적이다. 이런 영화를 동성애 영화라 해서 민원을 제기하고 그 민원을 앞장 세워 영화 상영을 못하게 하려는 것은 나치의 마인드에 다름 아니다. 검열과 폭력이다. 아무리 지금의 세상이 온통 비상식적으로 거꾸
극장가 한편에서 조용히 개봉 중인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연극 ‘라스트 세션’(국내에서도 2023년 대학로에서 번안 공연됐다. 신구 이상윤 출연)을 기반으로 한 작품인 만큼 매우 연극적인 작품이다. 두 배우의 다이얼로그가 영화 전반을 차지하고 내용도 꽤나 깊고 철학적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이전의 연극이 어쩔 수 없이 ‘평면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영화는 영화인 만큼 시공간을 오가는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프로이트 박사의 꿈과 환상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가 지니는 표현주의 미학의 정점 같은 것을 담보해 내는 것이다. 그런 장면은 마치 오래전 알프레드 히치코크가 만든 ‘스펠바운드’(1945)를 연상케 한다. 한국에서는 『 KBS명화극장 』 방영 당시 ‘백색의 공포’라는 제목의 영화였으며 그레고리 펙과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왔던 작품이다. 정신분석이지만 스스로 정신병, 강박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은 종종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 영상으로 이어진다. 이번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도 프로이트 박사(안토니 홉킨스)는 꿈을 꾸는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휠체어에 태워진 채
놀랍게도 한국영화 중 독립운동을 그린 영화는 그리 많은 편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툭하면 벌어지는 역사 논란들이 영향을 줬기 때문일 수 있다. 이상한 논란에 휘말리거나 공격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제작자나 투자자를 지배할 수도 있다. 홍범도 장군의 위대한 쾌거의 독립운동 전투 ‘봉오동 전투’(2019)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절묘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 영화를 요즘 같은 때에 다시 본다면 어떨까 싶다. 영화 ‘파묘’가 아무리 일부에서 반일 좌파적 영화라며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라는 식으로 떠들어 댄다 한들 관객 천만을 훌쩍 넘기는(11,913,519명) 대성공을 거둔 것은 어리석은 정치가 역사를 놓고 ‘대중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 정부와 국방부는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는데 홍범도 장군이 고려공산당 활동 전력을 문제 삼았다. 대중들은, 그렇다면 장제스와 마오쩌뚱의 1,2차 국공합작(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한 것) 역시 장제스의 공산당 활동 전력으로 봐야 하느냐는, 기이한 역사 해석을 요구 받는 셈이라 느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문제를 놓고 대중들의 정
한국에서 가장 과작(寡作)의 감독 군에 속하는 오승욱 감독이 9년 만에 세 번째로 내놓은 신작 ‘리볼버’는 필름 누아르에 정통한 감독과 제작자(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답게 어두운 욕망과 비정한 관계, 하드보일드한(hard-boild : 냉혹한) 액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가는 저점을 오가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자로서의 짐작으로는, 극의 결말 부분에서 감독과 제작자, 배우의 의견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관객들도 그 부분에서 영화에 대한 전체 반응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가 어떻다느니, 배우들의 연기가 어떻다느니 하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저급한 인상비평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리볼버’는 잘 만든 영화이고 나름 숨이 막히는 서스펜스가 있으며 이런 류의 영화 치고 속도도 빨라서 오히려 감독이 느린 작가주의 풍을 따라가지 않고 상업주의 영화의 흐름을 타려고 했다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이 정도면 흔히들 ‘재미가 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조영욱의 음악은 ‘올드 보이’나 ‘신세계’ 때처럼 자신의 강점과 특성(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크로스 오버 풍의)을 잘 살려 내고 있어 극적 긴장감